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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신호등]철거를 기다리며

◇박서화 사회부 기자

"에휴… 다 소용없어. 박 기자, 이런 거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거 잘 알면서 자꾸…"

책상 앞에 지도를 펼쳐 두고 그는 속절없이 담배만 태웠다. 재떨이에 비벼 끈 담배꽁초가 금세 수북이 쌓였다. 그는 주민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동물 감염병과 정책을 연구해 온 학자다. 채 피우다 만 연초가 하얀 연기로 사라지는 동안 나는 적었다. "침묵, 체념하게 하는 정치." 그 권력의 원천이 나는 늘 궁금했다.

시골길에 먼지를 뿜는 공사는 체념의 정치와 함께 커졌다. 산양이 다니는 곳, 주민들이 오가며 밭을 일구는 터전에 말뚝이 박히고 울타리가 늘어났다. 쉴 새 없이 '과학적 대응'을, 사업을 한다는 공지가 나왔다. 아프리카돼지열병 확산 방지가 주요 취지였다. 강원 북부, 북한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지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 공포가 퍼지던 시기,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19년 일이다.

"울타리 맨든다고 야생동물이 못 지나가나. 온 천지가 산인데, 무슨 의미가 있나. 그리고 주민들도 이동하기 불편해지는 걸 꼭 해야 하나" 길어지는 울타리를 보며 접경지역 주민들은 혀를 찼다. 주민들이 밭을 일구는 곳은 곧 야생동물이 잠드는 자리이기도 했다. 때로는 쫓아내고, 농작물 피해를 호소하기도 했지만, 주민들은 알고 있었다. 마을의 주인은 인간뿐이 아니라는 것을.

지식과 정책은 주민들이 발 디딘 땅과 거리가 멀었다. 지식은 지리정치적 서울에서 주민들의 땅으로, 정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내려' 왔다. 내려보낸 이들은 미처 몰랐을 점 하나, 정책이 닿는 땅에는 주민의 삶이, 그들의 지식보다 먼저 있었다. 야생동물의 보금자리도 거기 있었다. 다섯 해가 지난 2024년, 울타리가 늘어선 자리에서 산양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보고가 나왔다. 내려보낸 권력의 결과였다. 여섯 해가 지난 2025년 현재, 부정적인 결과가 곳곳에서 속출하자 이윽고 정부는 울타리 철거 여부를 논의 중이다.

정책을 '내려' 보낸 사람들이 울타리 철거 여부를 또다시 '연구'하기 시작한 지금도 지역과 시민이 복기해야 할 과제는 침묵 속에 있다. 누구의 현장이 지식이 되는가, 누구의 지식이 정책이 되는가. 지역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점 역시 지식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그렇다. 체계는 그대로 놔두고 위탁사업 개수만 늘리는 정책, 밀집사육 문화를 바꾸는 대신 울타리만 여러 개 박는 식의 정책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환경 분야 정책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역 고령 노동자가 절대 누릴 수 없는 노동정책, 지역에서 학교를 졸업한 뒤 살아갈 청년의 현실은 생각하지 않는 교육정책, 주민의 필요는 관심 없고 도심 대학병원에 사업지침만 내려보내면 끝이라는 식의 보건정책은 모두 '울타리 박는 정책'과 한 뿌리 아니던가.

철거의 갈림길에 선 울타리가 지역에서 사라질 즈음이면 주민의 삶 위 억압의 구조도 허물어질 수 있을까. 체념하게 하는 정치의 반대편, 공동체와 용기, 선의와 연대라는 또 다른 정치를 떠올린다. 1,747㎞, 길고 높은 울타리를 넘어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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