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단의 거목 전상국 소설가가 열 번째 중단편소설 전집 ‘남이섬’을 출간했다. 이번 소설집은 오랜 경륜에서 우러나온 작가의 깊이 있는 시선과 세상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비극부터 현대 사회의 불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원인으로 ‘마음의 감기’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치유와 소통의 메시지를 건넨다.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요한 정서 중 하나는 전쟁과 분단이 남긴 상처, 그리고 이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수록작 ‘드라마 게임’은 전쟁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한 가족을 파괴하고 또 지탱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또 다른 수록작 ‘지뢰밭’은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계속되는 마음속의 전쟁을 다룬다. 북쪽 유격대 출신이지만 남쪽에서 새로운 삶을 일군 노인 용우성은 실종자와 전사자들의 명단을 찾아 나선다. 이는 그를 괴롭히는 기억의 지뢰를 제거하려는 실존적 몸부림이다. 소설은 용우성을 바라보는 화자 장 선생을 통해, 우리 내면에 뿌리박힌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금기와 억압의 지뢰밭’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표제작 ‘남이섬’은 액자식 구성을 통해 ‘나미’라는 신비로운 존재를 추적한다. 한국전쟁 당시 남이섬에서 두 남자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묘사되는 '나미'는 여인, 인어, 혹은 괴물이나 귀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며 실체가 모호하다. 소설 속에서 나미는 전쟁이라는 죽음의 위기에서 생명을 구원한 어떤 힘을 상징하는 '떠도는 기표'로 남는다. 이러한 모호함은 현대 사회의 단절을 다룬 ‘춘심이 발동하야’로 이어진다. 진실한 소통이 부재한 인간관계를 풍자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 안병신의 실종은 곧 '진실의 실종'을 의미한다. 작가는 소통이 단절되어 독한 감기에 걸린 듯한 우리 사회에 진정한 소통을 향한 열망, 즉 새로운 감기(感起)를 불어넣고자 한다.
소설집의 또 다른 축은 노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다. ‘꾀꼬리 편지’의 쉰아홉 살 주인공은 사랑했던 사람의 유골을 뿌리며 “바람으로 물로 사라지는 투명한 비움”의 경지를 깨닫는다. 이는 작가가 보여주는 ‘은빛 상상력’의 절정으로, 상처와 욕망을 넘어선 차분한 관조와 비움의 미학을 보여준다. 전상국 소설가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한국 문학이 청년 문학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노년의 성찰이 주는 묵직한 울림이 필요함을 웅변한다. ‘남이섬’에 담긴 이야기들은 마치 정성스레 우려낸 녹차의 향기처럼, 독자들의 마음에 그윽하고 깊은 여운을 남길 것이다. 도서출판 강 刊, 292쪽, 2만2,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