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앞두고 강원도 영월군이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장항준 감독의 신작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 첫 주말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영월군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2025년 올해의 문화도시’로 꼽히는 겹경사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감동과 문화도시로서의 저력이 맞물리며 영월은 올 설 연휴 가장 ‘핫(hot)’한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 17세 소년의 한숨이 서린 700리 길… ‘단종 유배길’을 걷다
영화의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면 영월군이 조성한 ‘단종 유배길’을 주목해야 한다. 이 길은 1457년(세조 3년) 6월, 한양을 떠난 단종이 영월에 들어와 청령포에 이르기까지의 실제 이동 경로를 고증해 복원한 도보 여행 코스다. 총 43km에 달하는 이 길은 ‘통곡의 길’, ‘충절의 길’, ‘인륜의 길’이라는 세 가지 테마로 나뉘어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유배 행렬이 영월 땅에 처음 들어선 ‘솔치고개’는 소나무가 울창한 고개로, 어린 왕의 비통한 심정이 서려 있어 ‘통곡의 길’의 시작점이 된다. 이어지는 ‘어음정(御飮亭)’은 단종이 목을 축인 우물터로 전해진다. 가장 험준한 구간으로 꼽히는 ‘군등치(君登峙)’는 단종이 오르기에 너무 힘들어하자 호송하던 관리가 “임금(君)이 오르시는(登) 고개”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굽이진 산길을 넘어 도착한 ‘배일치(拜日峙)’에서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오래 머문다. 이곳은 단종이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성삼문 등 자신을 위해 죽어간 신하들의 모습이 떠올라 가마에서 내려 절을 올렸다는 고개로, 현재 이곳에는 엎드려 절을 하는 단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 솔숲에 갇힌 어린 왕의 고독… ‘육지 속의 섬’ 청령포
유배길의 종착지이자 영화의 주 무대인 명승 ‘청령포’는 영월 여행의 백미다. 삼면이 서강(西江)으로 둘러싸이고 뒤쪽은 험준한 ‘육육봉’ 암벽이 가로막고 있어, 배를 타지 않고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천혜의 감옥이다. 관객들은 배를 타고 청령포에 들어서며 영화 속 단종이 느꼈을 고립감을 실감한다. 울창한 송림 한가운데에는 단종이 기거했던 기와집 ‘단종어소’가 복원돼 있다. 그 주변에는 수령 600년이 넘은 천연기념물 ‘관음송(觀音松)’이 우뚝 서 있다. 높이 30m의 이 거대한 소나무는 유배 시절 단종이 갈라진 가지 사이에 걸터앉아 시름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고(볼 관·觀),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소리 음·音) 해 붙여진 이름이다. 숲을 지나 가파른 절벽인 ‘노산대’에 오르면 한양 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을 어린 왕의 뒷모습이 그려지고, 그 아래에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쌓았다는 돌탑 ‘망향탑’이 남아 있어 영화의 여운을 더한다.
◇ 죽음을 넘은 충절, 세계유산 ‘장릉’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은 영화 후반부 유해진이 연기한 엄흥도의 목숨 건 충절이 깃든 곳이다. 전해지는 야사에 따르면 1457년 단종이 관풍헌에서 승하하자 그 시신이 강물에 버려졌는데,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세조의 엄명에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세조실록은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 세상을 떠났고, 예를 갖춰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이때 영월 호장 엄흥도가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다면 달게 받겠다(爲善被禍 吾所甘心)”며 몰래 시신을 수습해 지금의 자리에 모셨다. 장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강원도에 위치해 있으며, 왕릉과 함께 충신 엄흥도를 기리는 ‘정려각’이 있어 그 의미가 남다르다. 최근 영화 흥행 이후 장릉에는 “단종 오빠 영화 보고 나오자마자 생각나서 여기까지 왔어…이제는 진짜 행복만 해도 돼”, “홍위야… 거기선 꼭꼭 행복하게 살아ㅜㅜ ” 등의 추모 메시지를 남기려는 관람객들의 발길이 온·오프라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 마지막 숨결 서린 ‘관풍헌’과 ‘자규루’
청령포에 홍수가 나자 단종은 영월 읍내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이곳은 단종의 생애 마지막 비극이 서린 곳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바로 관풍헌이다. 1457년 10월, 세조의 명을 받은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당도한 곳이다. 영화 속 클라이맥스이기도 한 이 장면에서 단종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관풍헌은 조선시대 관청 건물 중 드물게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현재는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사용되고 있어 누구나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볼 수 있다. 관풍헌 동쪽에 위치한 누각 ‘자규루(子規樓)’도 빼놓을 수 없다. 원래 세종 10년(1428) 영월군수 신숙근이 건립해 ‘매죽루(梅竹樓)’라 불렸던 이 누각은 단종이 머무르며 이름이 바뀌었다. 단종은 이 누각에 자주 올라 자신의 처지를 피를 토하며 구슬피 우는 소쩍새(자규·子規)에 빗대어 시를 읊었다.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孤身隻影碧山中)
(중략)
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天聾尙未聞哀訴)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何乃愁人耳獨聽)
- 단종의 ‘자규시(子規詩)’ 中
어린 왕의 피맺힌 절규가 담긴 이 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후대 사람들은 이 누각을 ‘자규루’라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번 설 연휴, 영월은 영화 속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여행지로 꼽힌다.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와 그의 묘소인 장릉을 천천히 둘러보며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아름다운 자연과 비운의 역사가 어우러진 영월만의 독보적인 매력을 만끽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가 전한 묵직한 울림을 안고 떠나는 영월 여행은 올겨울 잊지 못할 깊은 여운을 선사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