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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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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석 더벤처캐피탈 대표이사·전 경기대 교수

◇ 오연석 더벤처캐피탈 대표이사

넬슨 핸더스의 조언이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인생의 참된 의미는 자신이 그 그늘 아래 앉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 나무를 심는 것이다.” 그의 말을 접했던 순간엔 그저 새기기에 좋은 말로만 생각했다.  

어느 날 왕산 산자락에 올라 20여년 전 내 손으로 일궜던 많은 과수들이 흐드러지게 가지를 늘어뜨린 장관을 접한 순간, 비로소 그의 조언을 몸으로 느꼈다, 체험한 순간이었다. 삽질 한 번에 허리도 한 번 뻐근했던 날들, 묘목들이 이처럼 높이 자라 넓은 그늘을 만들 줄 몰랐다. 

심고 싶었을 뿐이다. 사는 일에 치여 내달리던 시절,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린 후 부지런히 손발을 놀려 돌을 고르고 흙을 파고 뿌리를 내려주었다. 무심히 20여 년이 흘렀다. 한 손으로도 족히 옮겼던 묘목들이 키를 훌쩍 넘는다. 햇볕이 뜨겁던 지난 여름, 그 그늘 아래 앉아 땀을 식혔다. 20여 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건넨 쉼표였고 느낌표였다.  

몇 년 전 친구들의 손을 빌려 엄나무 300그루와 몇 가지 과실수를 산자락에 심었다. 엄나무 는 성장이 느리다. 가시도 많은데 성장은 더딘 그의 묵직함은 계절과 함께 켜켜이 쌓인다. 3월초 함께 땅을 일궜던 친구들이 왕산을 찾아 퇴비를 밑동에 아낌없이 부었다. 얼마 후 두릅순이 끝동을 힘차게 밀며 올라오는 걸 보니 괜스레 마음이 설렜다. 

처음으로 제대로 수확한 엄나무순과 두릅을 된장과 고추장에 참기름을 더해 무쳤을 때 향과 맛이 어찌나 진하던지.  지난 6년이라는 시간이 그 한 접시에 오롯이 담긴 듯했다. 홀로 그 맛을 즐겼다면 절반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나눌 때 땅이 선사한 선물의 가치는 곱절이 된다. 상자 하나하나에 정성과 감사를 담아 부친 이 봄소식 봉지들이 카톡 한 줄로 되돌아왔다. “어디서도 못 살 맛이야.”  이 맛이 로켓배송으로 가능할까? 왕산의 맛은 속도의 맛이 아니라 기다림과 인연들이 함께 빚은 맛이니 어떤 시장에서도 찾을 수 없다. 

기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내년에 수확이 본격화되면 수익금 전액을 ‘전국대학생가치투자 대회’ 재원으로 활용할 셈이다. 강단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가치투자동아리의 지도교수로 활동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강의실과 동아리에서 가르친 이론을 토대로 투자에 적용할 수 있다면, 또 학생들이 돈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배우고, 합리적인 투자철학을 조기에 뿌리내린 다면 삶에서 마주칠 다양한 재무 현안에 현명하게 대처할 것이라는 확신 아래 학생들과 모의투자 대회를 기획했다. 

전국의 젊은 학생들이 투자와 투기를 구분할 소양을 기르고, 가치평가 법을 습득하며, 기업의 경쟁력을 자력으로 분석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투자 철학을 뿌리내릴 수 있도록. 거친 왕산의 나무 심기가 수년이 지나 수익을 내고 또 여기서 수확한 시드 머니가 어느 대한민국 청년에게 또 다른 ‘종자돈’이 될 것이다. 그 청년들이 우리 자본시장을 더 힘차게 이끌어갈 투자자로 큰다면 한 그루의 나무가 얼마나 넓은 쉼터를 드리울 수 있을 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삶의 가치는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느냐로 결정된다. 아이에게 건네는 한 마디, 벗에게 보내는 한 상자의 수확, 후학과 나누는 경험, 그 모든 것이 한 그루의 나무들이다. 2,30년 후 누군가 그 그늘 아래 앉을 것이다. 아직은 이름 조차 모르는 어떤 청춘과 꿈. “그러므로 성인은 일을 하면서 성취에 기대지 않고, 공을 성취해도 내 것이라 자처하지 않으며, 자신의 슬기로움을 자랑하지 않는다(是以聖人爲而不恃,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 (노자, 『도덕경』 제77장) 왕산에 봄이 올 때마다 나는 또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 설령 내가 그 그늘 아래 앉을 수 없더라도 애석해하지 않을 테다. 다만 나 의 오늘의 삽질이 헛된 삽질이 아니기를 조용히 바랄 뿐이다. 

오석기기자 sgtoh@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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