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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Week+]강릉최씨(필달계) 도문장 된 101세 최돈춘옹

春, 이름처럼 인생은 아직 봄이다

장수의 비결?

담백한 삶, 긍정적인 마음

매일 새벽 6시 일어나

밭 매고 장작 패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안해

늘 허허 웃으며 양보

큰아들 병원서 잘못됐을 때

부검하자는 것도 마다해

“죽은 아들 몸에 칼 대

돈 더 받는건 의미 없었어

돈은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아”

깨알 같은 글씨도

돋보기 없이 줄줄 읽어

3형제 이웃해 서로 의지

강릉 사천땅서 한평생

살아있는 지역의 산증인

강릉최씨(필달계) 가문에서 가장 연장자로 도문장이 된 최돈춘옹에 대한 존숭례(尊崇禮) 행사가 지난달 28일 오전 11시 강릉시성남동 농협 하나로 마트 3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도문장 존숭례는 한 가문의 후손들이 최연장자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고 존경의 예를 올리는 행사로 강릉 최(崔)씨 종친회가 주관이 돼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다.

이번에 도문장이 된 최돈춘옹은 강릉시 사천면에서 1912년 9월4일에 태어나 올해 101세가 됐다. 태어나 한번도 고향땅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최옹이기에 도문장 존숭례 행사에 만감이 교차했다. 최옹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우리집 장손으로 상복을 입고 도문장 존숭례 행사에 참여한 기억이 난다”며“내가 도문장이 돼 존숭례 행사를 한다고 해 한편으로는 뿌듯하면서도 자식들한테 부담이 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최 옹의 집안은 사천면 덕실리에서 유명하다. 강릉최씨 용연동파 내동댁 최응집 선생의 3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최옹은 어려서부터 마을 훈장이었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인들이 서당을 금지했고 아버지마저 최 옹이 16살 되던 해에 돌아가셔서 더 이상 배움의 길을 잇지 못하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최옹은 임씨 할머니와 결혼해 3남4녀를 두었는데 1973년 맏아들을 허무하게 잃었지만 다른 자손들은 건강히 할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최 옹의 곁에는 3형제가 이웃해 살며 지금도 자주 만나 우애를 나눈다.

둘째 돈하씨의 아들인 조카 정규(72) 씨는 “우리 집안이 돈은 많이 없어요. 재산은 없어도 형제 갈등도 없고 세분 우애는 정말 본받을 만합니다”고 말한다.

최 옹의 아버지는 3형제에게 봄, 여름, 가을의 이름을 남겼다. 최옹은 돈춘, 그 아우는 돈하(96), 막내는 돈추(91)옹이다.

아우인 최돈하 옹은 지금 파킨슨병을 앓고 있지만 73세까지 강릉단오제 씨름대회에서 5년 내리 우승하며 장사로 소문났다. 가을을 닮은 돈추 옹은 마을 노인회관에서 형의 말벗이 돼 늘 곁을 지킨다.

최 옹의 장수 비결은 담백한 삶과 긍정적인 마음이다. 매일 오전 6시면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고 집 앞 텃밭에 나가 밭을 맨다. 겨울인 요즘은 장작을 패고 주변을 청소하며 지낸다. 지난해에도 작은 텃밭에서 고추농사를 지어 6가마를 수확했다. 2가마는 내다 팔고 4가마는 자식과 손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다.

오전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나면 마을 노인회관으로 걸어가 동네 노인들과 화투나 장기를 두며 소일하다 오후 5시에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TV 를 보다 9시면 잠이 든다. “나이 먹고부터는 잠이 없어져 한숨 자면 잠이 안 와 이리저리 뒤척이며 궁리하다 보면 밤사이 기와집을 몇 채씩 짓는 게 일”이라면서 빙긋이 웃으신다.

잠이 안 오면 일어나 임영지를 읽는다. 1975년 발행된 임영지에는 강릉의 역사와 내력이 소상히 나와 있다. 깨알 같은 글씨를 돋보기도 없이 줄줄 읽어나가는 모습에 글씨가 잘 보이느냐고 묻자 재작년까지는 그런대로 봤는데 작년에는 아무것도 안보여서 눈 수술을 받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잘 보인단다.

옆에 있는 둘째딸 옥규(75)씨가 “작년에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고 설명해준다. 둘째딸이 바로 앞에, 외손녀 가족들이 또 그 아래 펜션과 레스토랑 등을 짓고 운영하고 있는데 자주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찾아와 최 옹의 마음은 늘 흐뭇하다.

귀가 어두워져 다른 사람 말소리가 잘 안 들리는 최 옹이지만 둘째딸이 말하는 건 다 알아듣는다. 재미있는 것은 둘째딸도 98세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지금도 농사일을 도맡아 할 정도로 건강하다.

101세, 98세 된 사돈끼리 이웃해 서로 의지하며 사는 모습도 드문 사연이다.

최 옹의 며느리도 효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복만을 고집하는 최 옹의 곁에는 60여 년 동안 곁에서 봉양해온 며느리 전양자(70)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첫 아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시아버지를 모시고 3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살고 있지만 지금도 새벽마다 시아버지의 한복을 곱게 다려 입힌다. 이러한 공으로 지난해 강릉최씨 대종회에서 효부상을, 또 2009년 농협중앙회가 선정하는 효부상을 각각 수상했다.

많은 학자나 의사들이 백수를 누리는 장수비결에 많이 움직이고 술, 담배 하지 않으며 소식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최 옹의 경우 많이 움직이고 술, 담배를 하지 않지만 소식은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이한 것은 최 옹의 밥상에서 빠지지 않는 한가지가 있는데 바로 소금이다. 며느리 전씨는 “하루 세 끼 밥을 꼭꼭 챙겨드시면서도 양껏 드시는 편”이라며“국 간을 맞춰놔도 소금을 넣어 드신다. 그리고 식사 후 물을 3~4컵 꼭 드신다”고 했다.

그리고 오랜 삶의 연륜에서 비롯된 많은 사연과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감내하며 산다. 조카인 정규씨는 “우리 큰아버지는 법 없이도 사실 분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시고 늘 낙천적으로 허허 웃으며 양보하고 이재에 어두워 손해도 많이 보셨다”고 말한다. 큰아들이 배가 아파 병원에 갔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사망한 사건 당시 주위에서 부검을 해 사망원인을 밝히자고 했지만 최 옹은 거절했다. 최 옹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칼을 댄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마는 이미 죽은 아들 몸에 칼을 대 사망원인 밝혀 돈 더 받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어. 돈은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며 당시 심정을 말했다.

그렇게 큰아들을 가슴에 묻은 이후 가세가 기울어 덕실리 일대 그 넓은 논을 하나 둘 정리했다. 덕실리 논을 정리한 뒤 지금 살고 있는 뱀 골로 들어왔다. 안보고 살면서 가슴에 남은 미련마저 정리했다. 그런 아픔을 가슴에 담아내고 늘 웃으며 지낸다.

최옹은 사천면에서 태어나고 자라 100세가 넘도록 덕실리에서 노동리로, 석교리로 집을 옮긴 적은 있어도 사천땅을 벗어난 적이 없다. 24살에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반장을 맡게 됐고 몇십 년을 반장일을 하며 공출 실태조사를 위해 골골마다 다녔다. 해방되고는 토지위원장도 지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사천 사람들이 땅이나 집을 살때면 최 옹에게 와 자문을 구할 정도로 사천면 골골 마다 내력을 줄줄 꿴다.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며 마을 이력을 설명한 최 옹은 “요즘 마을 만들기다 뭐다 해서 마을 이름을 옛날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봤는데 잘못 적은 것이 태반이야. 그래 쪽지에 적어놓고 사람들을 만나면 마을 이력을 알려주고 있어. 나 죽으면 이런 사연도 다 사라질 거야”라고 걱정하며 한참동안 각 마을의 이름 유래를 설명해 줬다. 옆에서 듣던 둘째 딸도 “그 마을 이름은 들어봤어도 그런 유래가 있는지 몰랐네요”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살아있는 지역 역사의 산증인 곁에서 같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강릉=조상원기자 jsw0724@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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