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종반정의 격변기를 살았던 그를 만나러
우리는 사천으로 차를 몰았다
황금들녘 끝자리 쌍한정 동산에 오르니
소나무와 벼,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빈부격차·세금으로 고통받는 백성에게
토지를 똑같이 나눠주는 개혁을 꿈꿨으나
이상과 현실을 조화롭게 일치시키기란
그 시대에도 쉽지 않은 문제였던 모양이다
결국 기득세력의 음모에 휘말려
벼슬을 잃고 고향으로 내려오게 됐으니
예나 지금이나 정치란 참 무섭고 더럽다
그럼에도 인간세상에서 필요불가결이니
억새가 흔들리는 그의 묘역에서
추수를 앞둔 넓은 논과 밭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땀이 여물었을까 생각했다
시대를 앞서간 그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
그의 이상을 펼치려 했던 바로 그 토지였다
거울처럼 매끈한 수면 깊기도 한데 / 겉모습만 보일 뿐 마음까진 못 비추네 / 만약 간담(肝膽)까지 밝게 보여준다면 / 경포대에 오를 사람 마땅히 드물겠지.//
경포대를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며 박수량(朴遂良)의 시를 떠올렸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에 놀러 왔다가 호수를 들여다보는데 거기에 감춰두었던 오욕(五慾)까지 고스란히 비춰진다면 누가 경포대에 오르겠는가. 그저 화장한 얼굴이나 잘 차려입은 옷, 꽃 그림자, 하늘의 구름과 달이 전부이니 저 옛날부터 우리는 껄껄거리며 호수 주변을 걷고 경포대에 오르는 것이다. 박수량은 일찍이 그것을 간파한 사람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박수량은 천성이 순후하고 지조가 구차스럽지 않으며, 소박하고 말이 적어 꾸밈이 없으며, 효행이 독실했다고 전한다. 어느 시대나 격변기가 아닌 때가 있겠는가마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기묘사화의 시대를 살다 간 박수량을 찾아 우리는 사천으로 차를 몰았다. 소나무가 우거지고 노랗게 변해가는 벼와 바다가 보이는 길을 따라서.
잠시 박수량이 살았던 시대의 정치상황으로 간략하게 돌아가 보자. 조선의 10대 왕이었던 연산군(1476~1506년)은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였다. 결국 폭군으로 지탄받아 중종반정(1506년)으로 폐위되었다. 재위기간은 12년이었다. 박수량은 연산 10년(150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등과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모친상 때문이었는데 그는 연산군이 제정한 단상법(1년 안에 상을 마쳐야 하는 법)을 거부하고 전통대로 시묘살이 3년을 했다. 그 기간에 일어난 중종반정은 성희안, 박원종 등이 주축이 되어 연산군을 몰아내고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 곧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다. 박수량의 지조와 효가 빛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소식이 임금에게까지 전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윽고 박수량은 강릉 사천을 떠나 조정으로 향한다.
중종실록에 수록된 박수량의 어록들을 살펴보았다. 요순시대 때의 정치를 지금도 다시 할 수 있겠느냐는 중종의 질문을 풀의 본성에 비유해 답한 '초성론(草性論)'을 필두로 그의 정치관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낸다. 무오사화 때 투옥되었다가 중종반정 뒤 좌의정에 오른 신용개(申用漑)가 '나라를 다스림에는 교화가 으뜸인데 교화의 근본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위의 초성론으로 답하며 뒤를 이어갔다. “옛말에 임금이 어질면 어질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이 진실로 덕으로 인도한다면 저절로 고무되고 흥기될 것입니다. 당우삼대(唐虞三代)의 치세(이상적인 태평 시대)는 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사천보건지소에 근무하는 소설가 주영선 씨의 안내로 하평뜰과 미노리가 갈라지는 다리 남쪽에 자리한 쌍한정(雙閒亭)을 찾았다. 효자비는 같은 담장 안에 있었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 뒤편에 있었는데 바로 옆 도로가 높아진 바람에 시야는 대부분 가려진 상태였다. 바위에 새겨놓은 '쌍한유적지'라는 문구대로 기묘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계를 은퇴한 박수량은 고향으로 돌아와 '고삐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을 힘차게 나는 천마와 같은 시풍'을 갈고닦았을 것이다. 당숙인 박공달과 함께. 두 사람이 홍수로 불어난 물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서 말을 주고받았다는 일유암(日遊岩)일지도 모를 바위 위에 올라 냇물이 바다와 만나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바다에서 눈을 돌리니 경지정리가 잘 된 사천의 넓은 논에서 벼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벌써 벼 베기를 마친 논도 드문드문 보였다. 그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바로 그 토지였다.
박수량은 좀 더 세부적으로 자신의 정치관을 역설한다. “신이 평소에 상께 아뢰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나라 백성의 빈부차가 너무 심합니다. 부자는 그 땅이 한량없이 많고 가난한 자는 송곳 하나 세울 만한 곳이 없습니다. 비록 정전법이 훌륭하다고 하나 지금은 시행할 수가 없으니 균전법을 시행하면 백성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이에 옆에 있던 신용개가 균전법의 장점은 인정하나 현실적인 문제를 언급하자 그는 한 걸음 더 나간다. “어진 정사는 반드시 경계를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 읍에 수백 결씩 땅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으니 이대로 5~6년만 지나면 한 고을의 땅은 모두 5, 6인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지금 이 땅을 고르게 분배하면 이야말로 선왕이 남긴 정전법의 뜻이 될 것입니다.” 당시 심각했던 빈부격차, 토지제도, 세금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의 복안인 것이었다.
정전(正田)은 무엇인가. 조선 시대의 농경지 가운데 휴한(休閑), 진황(陳荒)시키지 않고 해마다 경작하는 땅이 정전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 이래 농사법이 발달되면서 한 해 묵히는 땅이 줄어들게 되었다. 정전은 국가의 세수를 확보하기 위한 기본대상이었다. 그런데 세수 문제가 걸리다 보니 정전과 휴한, 진황되는 농경지 사이에서 문제가 왕왕 생겼다. 농사를 짓든 안 짓든 모두 세금을 걷어야 하는가. 땅이 많아 일부러 안 짓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전이라 하더라도 척박한 땅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등의 문제는 조선 후기까지도 계속 논란이 되어왔다. 균전법(均田法)은 무엇인가. 정전법과 마찬가지로 토지의 소유, 분배 및 조세징수제도의 한 형태다. 어떻게 세금을 걷는 게 올바르고 합리적일까. 정전법과 균전법 중 어느 것이 이상적인 제도인지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이후 조선 후기의 실학자와 지식인들은 농촌사회의 피폐를 근본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균전론을 주장했다. 골자는 토지를 국유화하고 모든 농민에게 균일하게 농지를 분배하자는 데까지 나간 것이다.
하여튼…… 박수량이 살았던 시대에도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던 모양이다. 박수량이 용궁(지금의 경북 예천)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의 일화를 보더라도 그렇다. 형제가 토지 문제로 싸움을 했고 결국 그들은 현감에게까지 그 문제를 들고 왔다. 현감은 이렇게 판결했다. “토지는 얻기 쉬우나 형제는 얻기 어렵다. 내가 덕이 없어 당신들이 이렇게 싸우고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당신들을 다스리겠는가.” 현감이 눈물까지 흘리며 얘기를 하니 형제는 크게 깨닫고 그 자리에서 소송문서를 불태웠다고. 거의 요순시대의 전설 같은 정치와 교화의 이야기다.
조선 중종 14년 기묘사화(1519년)가 터졌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파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 김정 등의 신진파를 죽이거나 귀양 보낸 게 그 대략이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파괴된 유교적 정치질서를 회복하려 했는데 두각을 나타낸 이가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과거제의 폐단을 혁신하려고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했는데 박수량도 거기에 천거된 사례다. 그러나 조광조의 급진적이고 이상주의적 왕도 정치는 곧 정적들이 생기고 왕도 거리를 두게 된다. 훈구 세력들은 궁중의 나뭇잎에다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 走肖는 趙의 破字)'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에 그 문자의 흔적을 왕에게 보여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란 게 참 무섭고 더럽다. 그럼에도 인간 세상에서 정치란 게 필요불가결이니…….
삼가봉 아래 억새가 흔들리는 박수량의 묘역에서 바라보는 사천의 넓은 논과 밭, 그리고 바다는 아름다웠다. 성리학을 공부하여 유학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박수량도 기묘사화 때 파직되어 고향으로 내려왔다. 황금들녘 건너편 끝자리에 그가 노닐었던 쌍한정 동산이 자그맣게 보였다. 추수를 앞둔 저 논과 밭은 누가 봄여름 땀 흘려 곡식들을 여물게 만들었을까 생각하며 나는 묘역을 내려왔다. 그의 시를 웅얼거리며.
벙어리 귀머거리 된 지 오래고 / 오로지 두 눈만 남아 있노라 / 시끄러운 세상일 / 알고는 있었지만 말할 순 없었다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