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강릉
학문이 높았으나 벼슬 뜻 없어
오직 산수를 벗 삼았으나
과거에 급제한 고향 사람 보고
어머니가 부러워하자
"무릇 자식된 자는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려야"
과거 응시해 사마시에 합격
이듬해 모친상 당하게 됐는데
연상군 '단상제'거부하고
여막에 거처하며 삼년상 치러
살아생전에 '효자정려'받아
학식 뛰어나고 경세에도 밝아
토지제도 개혁 '균전법'건의
기묘사화가 일어나 파직된 후
고향서 당숙 박공달과 정자 지어
시·술·담론으로 여생 보내
마을서 사당 세워 향사 지내
강릉시 사천면 사천천 하구 남쪽에는 후리둔지(揮罹屯地)라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후리둔지 지명은 마을 사람들이 고기를 잡기 위해 이 언덕에서 그물을 던져 후리질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인데, 후리둔지에는 숲이 우거진 봉우리가 있고 그 봉우리 남쪽 기슭에는 쌍한정(雙閒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1520년(중종 15년)에 삼가정(三可亭) 박수량(朴遂良·1475~1546년)과 병조좌랑을 역임한 사휴당(四休堂) 박공달(朴公達·1470~1552년) 두 사람이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을 벗하며 함께 소요하는 공간으로 세운 정자로 행정구역상으로는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 7번지에 위치한다. 쌍한정의 명칭은 이처럼 두 사람이 함께 한가로이 소요한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하며, 쌍한정은 강릉시 운정동에 소재하고 있는 해운정(海雲亭)과 함께 16세기에 건립된 강릉지방의 대표적인 누정으로서 당시 강릉지방 누정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쌍한정 옆에는 선생의 효비각이 있는데 효비각 안에는 효자비와 효자각기가 있다. 일부 자료에는 1814년(순조 14) 선생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묘표비(墓表碑)가 효비각 안에 함께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최근 필자는 선생의 묘지 앞에 그 묘표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자료가 사실이라면 어느 때인가 옮겨진 것이겠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비문의 제목은 '유명조선국삼가당박선생묘표(有明朝鮮國三可堂朴先生墓表)'이며 비문은 사헌부대사헌, 홍문관 및 예문관대제학 등을 지낸 이재(李縡)가 지었다.
후리둔지에는 쌍한정 외에도 박수량선생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는 일유암(日遊巖)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일유암이라는 명칭은 선생이 바위에 '촌옹박리인일유암(村翁朴里仁日遊巖)'이라 글을 써 새긴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글을 볼 수 없다. 바위의 모양이나 규모로 보면 여타 지역의 바위에 비견하여 그리 대단할 것은 아니지만 사실 사천천 일대에서 바위를 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사천(沙川)이라는 지명 또한 본래는 순수 우리말인 '모래내'에서 온 것으로 그 뜻은 모래가 많은 개천이라는 뜻이다.
박수량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강릉지역의 이름난 효자로서 자는 군거(君擧), 호는 삼가정(三可亭)이다. 선생은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의 후손으로 본관은 강릉이며 부친은 교수(敎授) 박승휴(朴承休)이고, 모친은 영해이씨 감찰(監察) 이중원(李仲元)의 딸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성품은 호탕하고 학문이 높았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고 오직 산수를 벗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은 어느 날 과거에 급제한 고향 사람이 방문하였을 때 어머니가 그를 칭찬하며 부러워하자 “무릇 자식된 자는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고 하며 과거에 응시하여 마침내 1504년(연산군 1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대과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듬해 선생은 모친상을 당하게 되는데, 이때는 마침 연산군이 상제(喪祭)의 개혁을 추진하여 국상(國喪)과 사대부의 친상(親喪)은 달(月)을 날(日)로 계산, 27일 만에 탈상하도록 하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상제(短喪制)가 매우 엄하게 시행될 때였다. 그러나 선생은 “차라리 쇠망치로 맞아서 죽더라도 선왕(先王) 때부터 지켜온 법은 어길 수 없다”고 하며 최복(衰服)을 입고 여막(廬幕)에 거처하며 삼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중종반정(1506년)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고 진성대군(晉城大君·중종)이 즉위하자 선생은 1508년(중종 3년) 이로써 살아생전에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받았다.
선생은 효성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학식과 인품이 뛰어났고 경세(經世)에도 밝았다. 1518년(중종 13년) 5월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중종 임금과 인견(引見)하는 자리에서 선생은 당시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던 토지 소유 불균등을 해소하기 위해 토지제도의 개혁, 즉 균전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 그해 7월 사은숙배(謝恩肅拜)를 올리던 날에는, 중종이“요순시대의 정치를 지금도 다시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선생은 “풀이라는 것은 그 맛이 옛날에 썼다면 지금도 그 풀은 쓰고, 옛날에 그 맛이 달았다면 지금도 단 것입니다. 풀의 성질이 변함이 없는데 인간의 본성이 어찌 옛날과 지금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요순의 정치를 지금이라고 못할 리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선생의 인품과 관련하여 충암(沖庵) 김정(金淨·1486~1521년)과의 한 일화가 전한다. 1516년(중종 11년) 충암 김정이 풍악산에서 오는 길에 선생의 집을 방문하였다. 충암이 며칠을 머물다가 작별인사를 할 때 선생이 충암에게 척촉장(철쭉나무 지팡이)을 선물하며 “깊은 산 층암절벽에 찬 서리 흰눈을 겪은 가지일세. 가지고 와서 그대에게 주노니 오래도록 이 마음 간직하게나”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 주었다. 그러자 충암은 “참뜻을 잃을까 의심스러워 궁촌에 살고 있으나 곧은 성품 남몰래 간직했으니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으리오”라고 화답하였다. 이처럼 서로 주고받은 시의 내용에서도 보이듯이 선생은 철쭉나무가 찬 서리 흰 눈을 견뎌내듯 사화(士禍)와 극심한 정치적 변혁 속에 낙향하여 자연을 벗하며 여생을 보냈지만, 반면 충암은 아직 젊은 혈기의 탓도 있겠으나 조광조와 함께 혁신 정치를 펼치다 끝내 비운의 죽임을 당했다.
선생은 유일로 천거되어 충청도사와 용궁현감을 거쳐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등을 지냈는데, 1519년(중종 14년) 겨울,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섬시주부에서 파직된 후,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와 스스로 삼가정이라 호를 짓고, 당숙인 박공달과 함께 정자를 지어 자연과 벗하며 시와 술, 담론으로 여생을 보냈다.
선생의 삶에서 그 무엇보다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사휴당 박공달일 것이다.
집안의 위계로 보면 박공달은 선생에게 당숙이며 연배로 보아도 다섯 살이 위였지만, 그분들은 그런 관계의 규범들을 뛰어넘어 친구이자 삶의 동지로서 여생을 함께하였다. 언제나 함께 지내며 시를 짓고 경학을 논했다. 비가 많이 내려 냇물이 불어날 때는 양쪽 언덕에서 마주 보고 잔을 들어 권하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선생이 71세를 일기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박공달은 “환해(宦海·벼슬살이를 바다에 비유)의 풍파에서 기묘년을 만나 그대 이미 신을 벗었고, 나도 집에 돌아와 먹고 앉았노라. 주진(朱陳)의 옛 마을에 개 짖고 닭 우짖도다. 세 칸 백옥(白屋·가난한 집)에 한 사내가 남북을 갈랐도다. 하늘은 어찌 돕지 않아 갑자기 죽었는가. 쌍한정의 달은 만고에 길이 빛나리라”며 벗을 잃은 슬픔을 읊었다고 한다.
선생의 묘소는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 삼가봉(三可峯)을 뒤로한 야트막한 야산에 자리하고 있어 선생의 발자취가 담긴 삼가봉과 선생의 묘소, 그리고 쌍한정이 서쪽에서 동쪽 바다를 향해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선생의 묘소 앞에 서서 먼 눈길로 뭍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곳에 앉은 쌍한정을 바라보고 있자니 비록 필자와는 500여 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있는 분이지만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마을에서는 1645년 처음 사당이 세워져 선생을 기리는 향사를 지내고 있는데, 전사청인 오사재(五思齋)는 강릉시 사천면 방동리에 소재하고 있다.
후일 선생과 박공달은 1645년(인조 23년) 최치운, 최응현, 최수성, 최운우 등과 함께 강릉지역의 향현(鄕賢)으로 배향되었다. 이후 1802년(순조 2년)에는 최수가, 1808년(순조 8년)에는 이성무, 김윤신, 박억추, 김열, 김담 등이 추향되어 오늘에는 모두 12분의 향현이 향현사에 모셔져 있다. 향현사는 현재 강릉시 교동 238-3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선생의 문집으로는 '삼가집(三可集)'이 전하는데, 불분권 1책 목판본으로 1794년(정조 18년) 후손 천희(天希)·시혁(時赫)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천희·시혁 등의 발문과 세계도, 시(詩), 부(賦), 의(疑), 간독(簡牘), 잡저, 후학 유언호의 발문, 그리고 부록으로 만장(輓章), 제문(祭文), 잡출별록(雜出別錄), 쌍한정기(雙閑亭記), 묘표(墓表), 정효비음기(旌孝碑陰記) 등이 실려 있다. 이어 '사휴선생유고(四休先生遺稿)'가 합록되어 있는데, 선생의 당숙인 박공달의 시와 제삼가당문(祭三可堂文), 현량과전지(賢良科傳旨), 계목(啓目), 행장(行狀), 저자의 조카 억추(億秋)의 농헌사적(聾軒事蹟), 박수량행장초(朴遂良行狀草)가 첨부되어 있다.
다시금 일유암을 찾으니 어느덧 개울 건너 하평리는 황금 들녘이다. 가을비 아래 문득 스스로 왜소함을 느끼는 것은, 선생의 삶이 이 바위처럼, 또 저 개울처럼, 그리고 저 너머 들녘처럼, 그렇게 굳고, 잔잔하며, 무르익고, 드넓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