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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법정에서 만난 세상]그놈 목소리, 그놈 메시지

이재원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 판사

10년 전 일이다. 휴대전화를 잠시 사용하지 못한 사이에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고, 통화중 착신 전화로 서울 본가에서 전화가 왔다는 문자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모친께 전화를 드렸고, 전화를 받은 모친께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 일이 없어 정말 다행이다” 하며 우셨다.

모친께서 집에 계시는데 휴대전화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고 한다. 아들인 내가 사고로 크게 다쳤으니 당장 수술비를 입금하라는 내용이었다. 모친께서는 놀란 와중에 집 전화로 내게 전화를 하셨는데, 통화 중으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나를 바꿔주겠다고 했는데, 수화기 너머 신음하는 목소리로 “엄마. 나… 너무 아파…”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통화 내용도 충격적이었지만, 내 역할을 한 사람의 목소리가 나와 너무 비슷해 모친께서는 전혀 의심하지 못하셨고, 서둘러 은행에 가시려던 찰나에 내 전화를 받으신 것이다.

당시 발신번호는 검찰청 민원실 번호였다. 발신자 표시를 조작해 전화한 것인데, 모친과 나 사이에 통화가 되지 않도록 계속 내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가족관계와 휴대전화번호 등이 모두 유출됐다는 생각에 불안했고, 범행 수법의 치밀함에 놀랐다.

그날 이후 모친께서는 보이스피싱에 대해 보다 경각심을 갖게 되셨고, 대출권유 문자 등 여러 불순한 범행의 시도에도 철벽같이 방어를 해 오셨다.

그런 모친께서 지난달 다시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으실 뻔했다. 이번에는 전 국민이 애용하는 메신저 프로그램을 이용한 범행 시도였다. 형에게서 메시지가 왔는데, 휴대전화가 고장이 났으니 모바일 쇼핑몰을 통해 문화상품권을 대신 구매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형에게 전화를 했지만 공교롭게 형이 회의 중이어서 연결이 되지 않았고, 바로 상대방으로부터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메시지가 왔다. 프로필 사진까지 완벽히 똑같았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 없이 상대방이 시키는 대로 원격제어 프로그램 등을 설치했고, 주민등록번호를 보내고 신용카드의 앞뒷면을 촬영해 보내려는 찰나에 진짜 형으로부터 전화를 받아 다행히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모친과 형 모두 휴대전화를 초기화하긴 했으나 도대체 어느 정도의 정보가 유출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불안한 상황이다.

법원에서 형사단독 재판과 영장 업무를 하고 있는데, 보이스피싱 범행과 관련한 사건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범정부 차원에서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지만, 갈수록 진화하는 범행수법에 피해를 근절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실제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에서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그들의 범행이 지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범행이 개인과 사회에 끼치는 폐해가 막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범행 관련자들에 대해 엄단을 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법원에 피고인으로 오는 사람들은 체크카드 등 접근매체를 빌려준 사람, 접근매체의 전달 및 수거에 관여한 사람, 현금인출 행위에 가담한 사람 등 하위가담자들이 대부분이다.

범행을 설계하고 범죄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범들은 국외에 체류하면서 메신저 등을 이용해 범행을 지시하고, 여러 단계에 걸친 자금세탁으로 추적을 피하고 있기에 검거가 쉽지 않다. 범행수법이 진화하는 것 이상으로 이를 방어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국제적인 공조를 통해 주범과 일당들을 일망타진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국민으로서, 그리고 사법기관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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