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사소송법 원칙 중 변론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송자료의 수집 및 제출책임은 당사자에게 있고, 당사자가 수집해 변론에 제출한 소송자료만을 재판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론주의의 내용 중 사실의 주장책임, 자백의 구속력, 증거의 제출책임(증명책임)이 있습니다.
사실의 주장책임은 당사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을 법정에서 주장해야 하고, 주장하지 않으면 유리한 법률효과의 발생이 인정되지 않는 불이익을 받는 것입니다. 자백의 구속력은 당사자가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면, 그 사실이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원칙적으로 위 인정 발언을 취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증명책임은 당사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을 증명해야 하고, 증거를 충분히 제출하지 못하면 그 사실이 소송상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민사소송에서는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증거를 제출해 법원을 설득해야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소송상 공격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인 항변권도 원칙적으로 항변권자가 행사의 의사표시를 하고 그 요건사실을 증명해야 효과가 발생합니다. 항변권 행사 의사표시만 하면 유리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으나 행사하지 않으면 그 이익을 받지 못하는 사례로 동시이행항변권, 소멸시효 항변이 있습니다.
동시이행항변은 양쪽이 서로 의무를 지는 계약에서 “상대방이 의무를 이행하기 전에 내 의무만 이행할 수는 없다”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성기훈이 오일남으로부터 달고나를 1,000원에 사기로 하는 매매계약을 체결했는데, 오일남이 성기훈에게 1,000원 지급 소송을 제기했다고 가정합니다. 오일남 측에서 매매계약 체결 사실을 증명하면, 성기훈 측에서는 추가적인 증거제출 없이도 “달고나를 받음과 동시에 1,000원을 주겠다”는 동시이행항변을 할 수 있습니다. 동시이행항변 요건사실은 위 매매계약 체결 사실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기훈이 ‘깐부니까 당연히 달고나도 주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아무 의사표시도 하지 않는다면, 판사는 오일남 전부 승소 판결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일남은 위 판결을 집행권원으로 달고나를 주지 않고도 성기훈으로부터 1,000원을 강제로 받아갈 수 있습니다.
소멸시효 항변은 권리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던 시점으로부터 장기간(일반적으로 10년)이 경과하면 더 이상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내용의 항변입니다. 예컨대 이몽룡이 성춘향에게 1,000원을 대여한 후 11년 후에 돌아와 대여금 1,000원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할 경우, 성춘향은 “10년의 소멸시효가 경과했으므로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항변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금전 대여 사실은 이몽룡이 증명해야 하고, 10년이 경과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명백하므로, 성춘향은 소멸시효 항변 의사만 법원에 표시하면 별도의 증거 제출 없이도 승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춘향이 ‘에이 그 오래 지난 걸 왜 갚나'라고 내심으로만 생각하거나 소멸시효 제도의 존재를 몰라서 항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판사는 이몽룡 전부 승소 판결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률전문가의 조력을 받지 않는 본인소송 당사자 중 ‘나는 잘못한 것 하나도 없으니 판사님이 알아서 판단해주겠지'라고 생각하는 분을 꽤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민사소송법상 판사는 당사자가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만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