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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신호등]지워진 50.5%…‘절반의 민심, 가려진 주권’

김오미 문화교육부 기자

일터에서 수 많은 여성들을 만난다. 산수(傘壽)를 맞은 원로 여성 배우의 무대에 웃음 지었고, 생애 첫 무대를 앞둔 신인 여성 배우의 연기에 눈물 지었다. 어느 여성 영화감독의 작품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당연한 이야기다.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니까.

하지만 조기대선 정국이 시작되자 여성의 존재감은 지워졌다. 2,241만 4,382명. 21대 대통령선거의 여성 유권자 수다. 전체 유권자의 절반 이상인 50.5%에 달하는 수지만, 후보들의 주요 정책 담론에 여성은 없었다. 강원 여성들은 곧바로 목소리를 냈다. 춘천·원주여성민우회는 “광장의 민의로 만들어낸 새 시대, 성평등 공약 없는 후보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비판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후보들에게 성평등 추진체계 강화, 비동의강간죄 도입, 성별임금격차 해소 등 구체적인 정책과 비전을 요구했다.

이상한 일이다. 단 1%의 표심만 움직여도 승패가 뒤집히는 선거판에서 무려 50.5%가 외면 당하다니. 지난 대선들과 비교해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남녀 동수 내각, 성평등 임금공시제, 포괄적 차별금지법 등 선거철마다 무수히 쏟아지던 공약들이 모두 자취를 감췄다. 불과 3년 전 치러졌던 20대 대선과 비교하면 더욱 이상하다. 여성가족부 존폐, 젠더폭력 대응 등 의제에 거리낌 없이 의견을 밝히던 후보들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모호한 답변과 침묵만이 남았다.

짧은 기간 진행되는 조기대선에서 완성도 낮은 공약은 불가피한 결과 일 수 있다. 계엄·탄핵 국면으로 인한 사회의 불안을 해소하는데 후보들의 방점이 찍혔을 수도 있다. 정치적 리스크를 동반하는 젠더 갈등 프레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여성계 현안을 취재하는 나 역시 그랬다. 혐오와 조롱의 댓글을 피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고, 그럴 때면 문장을 다듬고 단어를 바꿔 끼우곤 했다. 하지만 취재 현장에서 만난 여성들은 외쳤다. “여성이 지워진 대선, 불평등을 묵인하는 정치는 사라져야 한다”고.

비난이 아닌 비판을 이어가기 위한, 미래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강원 여성들은 지속적으로 의제를 발굴해냈고, 후보들에게 공약을 제시했다. 그 결과 후보들은 여성폭력에 관한 대응책을 속속 내놨고, 여성가족부 존립 여부도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어느 후보가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대선 토론에서 여성을 정쟁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저급한 혐오 발언을 쏟아냈지만 여성들은 멈추지 않았다. 차별과 혐오를 일삼는 이들의 눈치를 보거나 이에 편승하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지난 겨우내 광장을 비췄지만 이내 가려진 불빛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늘 광장에 존재했다. ‘촛불소녀’로, ‘유모차부대’로 시대의 필요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졌을 뿐. ‘여성가족부 폐지’ 단 일곱 자로 시작된 정권의 말로를 곱씹으며 지워져도, 가려져도 또다시 나아갈 이들을 응원한다. 50.5%의 민심은 절반의 주권자를, 절반의 유권자를 외면하지 않는 곳을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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