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천교대 겸임교수와 동국대 만해마을교육원 교수를 역임한 김진섭 작가가 정치와 사회, 문화적으로 조선다움이 뿌리내리기까지의 과정을 인물 중심으로 풀어낸 ‘왕과 재상’을 출간했다. 이 책은 조선 개국기,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기를 관통한 재상들의 삶과 정치를 통해, 기존의 왕 중심 서술에 가려졌던 ‘또 하나의 정치’를 조명한다. 왕이 조명을 받았다면, 이들은 그 빛이 드리우는 가장 깊은 곳에서 국정을 실질적으로 끌어간 이들이었다.
‘왕과 재상’은 단순한 인물 열전이 아니다. 김 작가는 배극렴, 조준, 김사형, 정도전, 하윤, 성석린 등 20여명의 재상을 통해 권력이 작동하는 양태와 정치의 윤리를 다층적으로 풀어냈다. 고려 말 벼슬길을 시작해 조선에서 재상에 오른 인물들의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왕조의 교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각자의 시대적 선택이 얼마나 복잡하고 절박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책 속 재상들은 이상과 현실, 신념과 생존 사이에서 끊임없이 ‘정치적 고뇌’를 반복한다. 정도전이 조선의 국가 설계를 주도했다면, 김사형은 태조와 태종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임했고, 하윤은 스스로 킹메이커를 자처하며 왕권과 신권의 줄다리기 한복판에 섰다. 주목할 지점은 저자가 ‘재상’을 단지 고위 행정관이 아닌, 사상가이자 전략가로 조명했다는 점이다. 개혁의 야망, 권력의 줄타기, 정치적 타협과 배신, 그리고 때로는 침묵으로도 권력을 견디는 ‘지략의 역사’가 이 책의 핵심 줄기를 이룬다.
책 속에는 한 편의 역사극을 방불케 하는 장면들도 곳곳에 배치된다. 조준이 기생 국화를 수장(水葬)하는 장면은 조선 정치의 도덕성과 현실의 간극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태종에게 반기를 든 인물들의 운명은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이렇듯 어떤 교과서에서도 느끼기 어려웠던 정치의 비정함과 인간적 딜레마가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 책은 역사를 왕의 시선에서 재구성하는 대신, 정치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 이들의 ‘결’과 ‘결정’을 통해 새롭게 말하려 한다. 왕조의 정통성과 국가 경영의 실무 사이에서, 때로는 충성보다 냉철함이 더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책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성사 刊 384쪽. 2만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