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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AI로 빼앗긴 미소를 되찾다” …80년 만에 다시 ‘광복’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광복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일제감시카드 속 그들의 얼굴은

여전히 일제 강점기 그날의 어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차가운 렌즈 앞에 섰던 강원의 독립운동가들.

일제의 서슬퍼런 감시의 눈초리는

그들의 이름과 신상, 그리고 굳은 표정까지 빼곡히 기록했습니다.

웃음은 사치였고, 미소는 반역이었던 시절,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시나브로 8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늘, 우리는 AI라는 21세기의 기술로 그들에게 빼앗긴 것을 되돌려주고자 합니다.

단 한 번도 짓지 못했던 미소를,

단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던 따스한 웃음을 말입니다.

디지털 붓질 하나하나에 우리의 염원을 담았습니다.

이제는 마음껏 웃어도 된다는 후손들의 편지를 픽셀마다 새겼습니다.

화면 속에서 피어나는 그들의 미소는 단순한 이미지 변환이 아닙니다.

그것은 80년을 건너온 광복의 완성이며,

우리가 그들에게 전하는 가장 늦은, 그러나 가장 진심 어린 ‘감사’입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광복둥이로 태어난 강원일보는, 일제감시카드 속 강원 독립운동가들의 미소를 복원했습니다.

빼앗긴 웃음을 되찾아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꿈꾸던 해방된 조국, 바로 그곳에서 지었을 미소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 강원일보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제작한 이미지는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 등록된 강원도 출신 독립유공자 1,011명 중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등재된 80명을 가나다순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 강석대(화천·1857~1920년)는 1919년 3월23일 천도교 중앙본부로부터 독립선언문과 지령문을 가져와 화천만세운동을 전개함

2. 고광돈(정선·1919~2009년)은 1938년 춘천농업학교 재학 중 비밀결사 독서회에 가입해 활동

3. 국중일(철원·1922~2015년)은 1941년 재경유학생동맹을 조직해 신사참배와 내선일체 반대 등 항일투쟁 진행

4. 권원호(고성·1904~1944년)는 1941년 회양감리교회의 전도사로 재직하며 일제의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거부

5. 권태종(강릉·1908~1990년)은 1933년 6월 강릉에서 조선독립과 신사회건설을 희망하고 비밀결사에 가입

6. 김경화(양양·1901년~미상)는 1920년 3월1일 배화여학교에 재학 중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주도

7. 김계호(양양·1902~1948년)는 1919년 4월4일 양양만세운동에서 선창하며 시위 주도

8. 김기영(삼척·1898년~미상)은 1919년 3월1일 서울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종로만세운동에 참여

9. 김기현(홍천·1893~1956년)은 1919년 4월1일 홍천 신장대리 시장에서 독립만세 외침

10. 김두섭(회양 현 북한·1922년~미상)은 1937년 춘천공립농업학교 재학 중 독립운동 비밀결사 독서회에 가입해 활동

11. 김병하(양구·1859년~미상)는 1919년 4월3일 양구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천도교 신자 수십명과 군청 앞에서 독립만세 외침

12. 김병하(평강 현 북한·1885~1961년)는 1919년 4월4일 이천 낙양면 내락리 및 문상리 이민들과 문석리 시장에서 만세운동 전개

13. 김복기(원주·1889~1950년)는 1919년 4월11일 원주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시위 주도

14. 김사봉(원주·1896~1943년)은 1919년 4월9일 원주 지정면 안창리 후방의 산중에서 수십명의 리민과 독립만세를 외침

15. 김성서(횡성·1852년~미상)는 1919년 4월1일 횡성 시장에서 만세운동 주도

16. 김수완(홍천·1901~1969년)은 1919년 3월31일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4월1일 홍천 신장대리 시장에서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 외침

17. 김승원(평강 현 북한·1918년~미상)은 1937년 11월경 춘천공립농업학교 재학 중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독서회에 가입해 활동

18. 김시묵(평강 현 북한·1918년~미상)은 1937년 11월 춘천공립농업학교생 이준환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 비밀결사 독서회에 가입해 활동

19. 김연옥(이천 현 북한·1872년~미상)은 1919년 4월6일 이천 용포면 창전리에서 마을 제사에 모인 군중과 시위행진 전개

20. 김영래(춘천·1897년~미상)는 1929년 2월 춘천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강원도지부 설치 등 협의

21. 김영옥(강릉·1868~1924년)은 1919년 4월1일 홍천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해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기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함께 독립만세 외침

22. 김용운(삼척·1906~1980년)은 1930년 북평시 반제동맹 한인지부에 가입해 항일 격문을 배포하고 ‘타도 일본제국주의’ 등의 벽서활동 진행

23. 김우종(홍천·1905~1993년)은 1932년 경기도 고양에 동민학교를 설립해 애국정신과 독립사상 교육

24. 김재한(양양·1889~1967년)은 1919년 4월4일부터 7일까지 양양과 현북면 중심으로 만세운동 일으킴

25. 김점손(회양 현 북한·1909년~미상)은 1937년 3월9일 삼도교 교주 등과 조선총독부 앞 광장에서 만세운동을 계획

26. 김종대(양양·1892년~미상)는 1919년 4월9일 양양 현북면 면사무소에서 면민들과 독립만세를 외침

27. 김준모(화천·1878년~미상)는 1919년 3월3일 화천 하남면 논미리 천도교 교구실에서 ‘독립선언서’ 88매를 전달받아 만세시위 준비

28. 김창환(양양·1884~1968년)은 1919년 4월9일 양양 기사문리 만세고개에서 1,000여명의 군중과 독립만세 외침

29. 김현구(철원·1882년~미상)는 1919년 3월2일 철원 천도교구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받아 철원군내에 배포

30. 김홍권(회양·1910년~미상)은 1937년 3월 9일 삼도교의 교주 등과 조선총독부 앞 광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실행

31. 김홍렬(회양·1902년~미상)은 1937년 3월 9일 삼도교의 교주 등과 조선총독부 앞 광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실행

32. 김홍섭(회양·1896년~미상)은 1937년 3월 9일 삼도교의 교주 등과 조선총독부 앞 광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실행

33. 김홍식(회양·1908년~미상)은 1937년 3월 9일 삼도교의 교주 등과 조선총독부 앞 광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실행

34. 김홍진(회양·1900년~미상)은 1937년 3월 9일 삼도교의 교주 등과 조선총독부 앞 광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실행

35. 김희찬(통천·1921년~미상)은 1938년 4월부터 1941년 2월까지 강원춘천농업학교 재학중 독서회 조직

36. 남궁억(홍천·1863~1939년)은 1896년 7월 서재필·이상재 등과 독립협회 창립. 모곡학교에 무궁화 묘포(苗圃)를 만들어 전국에 한국의 나라꽃인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개.

37. 노상열(양양·1897년~미상)은 1925년 4월 제1차 조선공산당의 전남 집행위원에 선임돼 간부로 활동

38. 문세현(춘천·1917~1945년)은 1937년 3월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 동교생과 항일학생결사 상록회를 조직

39. 출신 민병태(홍천·1870~1919년)는 1919년 4월1일 홍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800여명을 이끌고 면사무소로 가 만세를 외치던 중 총탄에 맞아 순국

40. 박광훈(영월·1882~1938년)은 1919년 4월21일 장꾼 70여명을 모아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 외침

41. 박성록(화천·1891~1938년)은 천도교인 김창의와 1919년 3월23일 화천읍 장날 거사 계획, 주민 100여명을 모아 만세운동 벌임.

42. 박수영(영월·1871~1945년)은 박광훈·박재호 등과 1919년 4월21일 주천면 장날 만세시위를 계획, 군수에게 독립만세 외치게 함

43. 박승엽(이천 현 북한·1862년~미상)은 1919년 4월6일 용포면에서 군중 100여명과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손에 쥐고 시장을 돌며 독립만세 외침

44. 박용덕(고성·1913~2011년)은 1938년 민중 계몽을 목표로 민족문학잡지사 설립 자금을 모으다 체포, 이후 민족문학지 '문장' 운영자금을 대고 1941년 폐간까지 활동.

45. 박용철(철원·1904~1976년)은 1919년 철원농업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해 시위 주도, 1922년 상해로 망명해 청년동맹회 위원, 임시정부 지원, 한국독립당 활동에 힘씀

46. 박재호(영월·1885~1949년)는 1919년 4월21일 주천면 장날 박광훈·박수영 등과 만세시위를 계획해 영월군수 앞에서 독립만세 외침

47. 춘천 출신 박찬하(1922년~미상)는 1938년 춘천공립농업학교 재학 중 학생들과 비밀결사 ‘독서회’ 조직해 한글소설을 보며 민족주의 사상을 연구

48. 백흥기(횡성·1920년~미상)는 1937년 춘천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학생결사 ‘상록회’ 조직. 졸업 후 만주 길림에 상록회를 조직해 간도에서 활동.

49. 송경섭(홍천·1890~1949년)은 1919년 4월1일 신장대리 시장에서 차봉철과 주민 200여명과 함께 홍천군청으로 행진하며 독립만세 외침

50. 송병기(횡성·1891~1930년)는 1919년 4월12일 주민 70여명을 모아 분일리 뒷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 외침

51. 송찬용(회양 현 북한·1898~1965년)은 1919년 4월15일 광고문 20통을 제작·배포해 회양독립만세운동 전개, 16일 시위가 일본군 진압으로 무산된 후 독립군 자금 모금

52. 신기철(춘천·1922~2003년)은 1938년 항일학생결사 ‘상록회’ 재편 시 서적계를 맡아 회장으로 활동하며 독서토론 및 귀농운동 전개

53. 신재근(횡성·1856년~미상)은 자금 3원으로 태극기 20매와 독립선언서 40매를 준비해 1919년 3월27일 횡성 장날 군중 300명과 독립만세 외침

54. 신현철(원주·1892~1943년)은 1919년 4월5일 동지들과 사전 연락으로 수백명을 모아 부채고개와 소초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 외침

55. 심부윤(삼척·1905~1951년)은 삼척공립보통학교 2학년 재학중 4학년생인 김달하(金達河)·오원모(吳元模) 등과 함께 운동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시위운동에 참가.

56. 양순모(삼척·1905~1945년)는 북경반제동맹에 가입해 의열단장 김원봉의 지도를 받으며 항일운동 전개, 재차 망명한 끝에 춘천에 돌아와 광복 맞음

57. 염재근(강릉·1915~1992)은 1933년 7월 강릉공립농업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사의 비교육적 행위에 항의해 동맹휴학 주도

58. 염형우(김화 현 철원·1901~1930년)는 1919년 서울 3·1운동에 참여해 ‘8면에서 관찰한 조선의 참상’과 '반도의 목탁'을 인쇄·배포

59. 오정현(양양·1888~1960년)은 1919년 4월9일 현북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1,000여명과 독립만세 외침

60. 용환각(홍천·1917~1979년)은 1937년 춘천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백흥기·조규석 등과 항일학생결사 ‘상록회’를 조직한 후 5학년 대표를 맡아 항일운동 진행

61. 윤익섭(통천 현 북한·1924~1964년)은 1939년 춘천중 재학 중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만나 항일독립사상을 접한 뒤 교내 독서회를 조직해 민족차별과 식민지교육에 항거

62. 이개동(삼척·1905~1944년)은 삼척청년동맹과 신간회 삼척지회에서 청년운동 전개, 1933년 유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산업별노동조합지도위원회를 조직해 노동·농민운동 진행

63. 이광훈(홍천·1924~1943년)은 1938년 춘천중 상록회 사건으로 전회원 137명이 체포되자 상록회의 뜻을 잇고자 독서회 조직

64. 이교관(춘천·1890~1966년)은 1919년 3월 집집마다 찾아가 참여를 독려하는 등 춘천만세운동 계획

65. 이기소(삼척·1905~1970년)는 일제가 주민에게 도로 건설 강제 부역과 공사비 강제 납부를 요구하자 이에 항거해 도로공사 반대운동 주도

66. 이병렬(회양 현 북한·1907년~미상)은 함용환을 교주로 하는 삼도교에 가입해 신도들을 이끌고 경성 조선총독부 앞 광장에서 만세운동 참여

67. 이상국(강릉·1912~1950년)은 1933년 3월부터 강릉에서 강릉적색농민조합에 가입해 활동

68. 이석규(고성·1894~1960년)는 1919년 10월 비밀결사 대한독립애국단 양양군단에 가입해 활동

69. 이은송(이천 현 북한·1907~1977년)은 동아일보 이천지국 기자로 일하며 '이천자유회'를 조직해 농촌 계몽운동 진행

70. 이재관(원주·1887~1971년)은 원주 소곡리에서 주민 수십명을 모아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 고창

71. 이정구(철원·1872~1946)는 1919년 3월2일 장남 이순철과 함께 철원 주민들에게 독립선언서 배포

72. 이종식(춘천·1917년~미상)은 1936년 이홍래 등과 조선 독립을 위한 결사를 꾸리고 1938년에는 학생들에게 농촌 부흥과 주권 회복 강조

73이현순(원주·1879년~미상)은 1919년 4월9일 주민 40여명을 모아 태극기를 들고 흥업리만세운동 주도

74. 이홍근(홍천·1902~1948년)은 1919년 4월1일 수백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며 홍천만세운동 주도

75. 이희남(회양 현 북한·1925~2008년)은 1941년 서울철도종업원양성소 재학 중 경성유학 5인조에 가입해 총독정치를 비판하고 독립운동계획 논의

76. 임윤항(홍천·1895~1972년)은 1919년 4월1일 홍천만세운동 참여해 군청 등지에서 대한독립만세 외침

77. 장용하(원주·1900~1978년)는 1919년 경고문·조선독립신문·반도의 목탁 등 비밀 문서 수차례 복사·배포하며 출판을 통한 독립운동 전개

78. 장일규(홍천·1900~1969년)는 1919년 4월1일 홍천만세운동 준비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을 모아 태극기 제작

79. 장호면(양구·1867년~미상)은 천도교인으로 1919년 4월3일 천도교가 주도한 양구만세운동 참여

80. 장흥도(양구·1865년~미상) 천도교인으로 1919년 4월3일 천도교가 주도한 양구만세운동에서 선두로 행진

※각 인물에 대한 설명은 좌측 상단에서 우측으로 순서대로 진행니다. 두번째 줄부터도 동일하게 좌측에서 우측으로 순차적으로 이어지며, 사진 배열을 기준으로 각 인물에 대한 설명이 동일한 순서로 제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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