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은 전환을 통해(Preservation through conversion)”
1847년 설립된 독일 에센 졸버레인(Zollverein) 탄광 산업단지는 한때 8,000여 명의 광부가 투입돼 하루 1만2,000톤의 석탄을 캐냈다. 그러나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석탄 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결국 1986년 문을 닫았다. 산업화를 견인했던 도시는 폐광 이후 ‘보존’을 택했고,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며 세계적 문화·관광 중심지로 부활했다.
졸버레인 산업단지에 새겨진 이 문구는 폐광 이후의 미래를 고민하는 오늘의 강원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은 산업의 흔적을 예술과 교육, 관광의 공간으로 재구성하며 도시 재생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취재진은 강원 탄광 도시의 미래를 위한 해법을 찾기 위해 독일 에센 졸버레인을 찾아 산업 유산 보존과 지역 재생의 현장을 확인했다.
■철거의 문턱에서 재생의 길을 찾다=에센 졸버레인의 보존 논의는 폐광 이후가 아니라 문을 닫기 수십 년 전부터 시작됐다. 1960년대 후반 석탄 산업 쇠퇴와 함께 거대한 탄광 시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논쟁이 이어졌다. 건축가, 시민단체, 문화예술계는 산업의 흔적을 미래 세대에게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치권은 막대한 유지비 부담을 이유로 철거에 무게를 뒀다.
1986년 졸버레인이 공식 폐광되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정부는 잉여 산업 시설을 철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정부는 보존 정책을 택했고, 이때부터 산업 유산 재생 프로젝트가 본격화됐다.
2000년대 들어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Rem Koolhaas)는 ‘마스터플랜 Zollverein’ 작업을 통해 세척장의 붉은 철골과 유리 구조, 상징적인 에스컬레이터를 부각했다. 산업의 흔적을 보존하면서도 현대적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후 졸버레인은 공장 부지의 형태와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박물관·디자인센터·레스토랑·카페·공연장·수영장 등으로 용도를 재구성했다. 단지는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며, 중심부인 샤프트 12에는 루르박물관과 레드닷디자인박물관이 자리한다. 코크스 공장은 문화 행사와 여가 공간으로 개방돼 있으며, 샤프트 1·2·8 구역은 초기 탄광 시설을 복원해 교육 및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탄광의 심장부, 세척장으로 들어가다=에센 중앙역에서 트램을 타고 15분을 달리면 붉은 벽돌과 철제 프레임이 어우러진 졸버레인 산업단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단지 중앙에는 갱도 깊숙한 곳에서 석탄과 광부를 오르내리던 55m 높이의 권양탑이 우뚝 서 있다.
권양탑을 지나 샤프트 12 구역에 들어서면 옛 석탄 세척 공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척장으로 오르는 24m 길이의 붉은빛 에스컬레이터는 석탄이 녹여낸 용융철의 색을 형상화한 것이다. 불길처럼 타올랐던 산업의 열기가 건물 곳곳에서 문화와 예술의 빛으로 되살아난 듯한 인상을 준다.
세척장(Kohlenwäsche) 내부에는 당시 모습을 간직한 철골 구조물과 설비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분진 폭발을 막기 위해 공기를 빨아들이던 치클론(Zyklon), 석탄을 무게별로 분류하던 세츠마시네(Setzmaschine), 물결로 석탄을 세척하던 파동 세척 장치(Kohlenwäsche mit Wellenbewegung) 등이 대표적이다. 일부 공간에는 영상과 음향을 더해 기계가 실제로 움직이던 모습을 재현해 관광객들이 과거 작업장의 리듬과 소음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졸버레인 재단이 운영하는 가이드 투어는 1시간 간격으로 신청할 수 있다. 전문 해설사와 함께 세척장 내부를 둘러보며 석탄이 채굴되고 분류되던 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에 따르면 가이드 투어 참여자는 연간 40만 명을 넘으며, 독일은 물론 해외 각국의 학교·기관 단체 방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박물관 직원 클레멘스(Klemens) 씨는 “졸버레인은 이제 과거의 산업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현장”이라며 “매년 수십만 명이 이곳을 찾아 유산을 배우고, 때로는 결혼식과 웨딩 사진을 찍는 ‘새로운 시작의 장소’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문화로 이어진 산업의 기억=샤프트 12 구역 내부에는 루르 지역의 자연사·문화사·산업사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루르박물관(Ruhr Museum)’도 자리한다. 과거 세척장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이 박물관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갈수록 시대가 흐르는 구조를 갖고 있다. 지하층에는 공룡과 식물, 해양 생물 화석 등 자연사 전시가, 상층부에는 석탄 산업의 역사와 광부들의 삶, 산업 쇠퇴 이후 도시 변화를 다룬 산업·사회사 전시가 이어진다.
관람객 안나 슈미트(Anna Schmidt) 씨는 “과거 산업 현장뿐 아니라 루르 사람들의 삶과 예술, 그리고 시대의 변화를 함께 느낄 수 있어 좋았다”며 “이곳이 탄광 단지였다는 사실조차 잊었다”고 말했다.
졸버레인 산업단지는 루르 지역의 자연과 인간, 예술을 아우르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주말이면 가족 단위 관람객과 기관 단체가 꾸준히 찾고, 지역 예술가들의 전시가 이어지며 활기를 더한다. 폐광의 상징이던 공간은 이제 도시 문화의 새로운 통로가 됐다.
■재단이 만든 지속 가능한 보존의 길=이날 졸버레인 안내를 맡은 하인츠 빌헬름 호파커(Heinz-Wilhelm Hoffacker) 씨는 독일 보훔대에서 기술사(Technikgeschichte)를 전공한 박사다. 독일 석탄 산업의 흥망성쇠를 직접 지켜보고 연구한 그는 “강원도 폐광지역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려면 지역을 책임질 관리 주체와 재단 설립이 필수적”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졸버레인은 재단을 통해 시스템적으로 운영되는 산업 유산”이라며 “보존은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강원의 폐광지역도 제도와 주체를 세워 장기적으로 관리한다면 새로운 문화와 산업의 거점으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졸버레인 재단은 1980년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정부로부터 상징금 1마르크에 산업단지를 넘겨받아 보존과 운영을 맡아왔다. 현재는 주 정부와 연방정부, EU, 기업, 시민 후원금 등을 모아 유지·관리를 이어가고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