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5년의 봄(2월9~16일), 정조는 6,0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수원 화성으로 향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고 봉수당에 이르러 회갑잔치를 치른 과정을 담고 있다. 겉으로는 화려한 축제의 기록이지만, 행간에는 서늘한 긴장감이 흐르는 선전포고문과 같은 것이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모티브로 한 ‘의궤, 8일간의 축제’는 그런 역사의 행간을 들여다 보고 있는 다큐영화다. 즉위 20년, 정조는 도대체 왜 이토록 거대한 ‘무력 시위’를 기획했을까. 그 웅장한 행차의 이면에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조한 세력을 향한 군주의 서슬퍼런 경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영화 ‘사도’가 뒤주에 갇힌 세자의 비극을 다뤘다면, ‘역린’은 즉위 직후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젊은 정조의 고독을 그렸다. 1795년의 을묘원행은 이 모든 비극과 위협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정조의 승부수였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즉위 첫날 “아! 과인은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정조실록1권, 정조 즉위년 3월 10일)”라고 선언하며 정국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노론 벽파의 저항도 끈질겼다. 그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죄인에 대한 정당한 처분’으로 규정하며 정조의 정통성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즉위 20년이 되던 해, 정조는 더 이상 말이 아닌 힘으로 그들의 입을 막기로 결심한다.
다큐영화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은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舟橋)와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이다. 의궤에 기록된 행렬 인원은 6,000여 명, 동원된 말은 1,400여 필에 달한다 . 단순한 회갑 잔치치고는 지나치게 거대한 규모다. 실록은 이 행차의 성격을 ‘효(孝)’로 규정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의 위용이 자리하고 있었다 .
정조는 화성에서 야간 군사 훈련인 ‘성조(城操)’를 직접 지휘하며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과시했다.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던 노론 벽파를 향해 “이제 나에게는 너희를 제압할 충분한 힘이 있다”는 무언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정조의 내밀한 고뇌는 실록의 짧은 기사 속에서도 발견된다. 을묘원행을 앞두고 정조는 이복동생 은전군 이찬의 죽음을 마주해야 했다. 벽파가 은전군을 추대하려 하자, 정조는 왕권 수호를 위해 혈육을 자결하게 하는 결단을 내린다. “아! 내가 이에 있어서 또한 차마 말할 수 없는 바가 있다.(중략) 이찬(李禶)은 자진(自盡)하도록 하였으며…(정조실록4권, 정조 1년 9월 24일)” 정조는 은전군에게 ‘가련하도다’라는 뜻의 ‘연재(憐哉)’라는 자(字)를 지어줄 만큼 그를 아꼈다. 하지만 권력의 비정함은 그를 눈물짓게 했다. 을묘원행의 웅장함은 어쩌면 이러한 혈육의 희생과 암살 위협을 딛고 일어선 군주의 처절한 생존 기록이기도 하다.
이전의 의궤들이 보관용이었다면, ‘원행을묘정리의궤’는 ‘배포용’이었다 . 정조는 자신이 거둔 정치적 승리와 화성의 위용을 온 나라에 찍어 보냈다. 다큐영화 ‘의궤, 8일간의 축제’가 보여주는 화려한 영상미는 정조가 200년 전 활자로 박제해 둔 ‘승리의 서사’를 현대적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더 읽어내야 할 것은 화려한 축제의 의상 보다는 그 속에 감춰진 군주의 차가운 복수심과 뜨거운 눈물이 아닐지.
오석기기자 sgtoh@kw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