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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조선왕조실록·의궤 톺아보기]원행을묘정리의궤(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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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화려한 왕의 행차가, 가장 낮은 곳을 향했다

정조의 ‘을묘원행’이 향하는 것은 결국 백성이었다. 1795년 윤2월 14일, 화성 낙남헌(洛南軒)에서 펼쳐진 양로연은 신분과 계급을 넘어선 파격의 현장이었다. 정조는 왜 어머니의 회갑 잔치에 이름 없는 노인들을 불러 모았을까. 8일간의 축제를 마무리하며 정조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 야망을 넘어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 되는 ‘민국(民國)’의 세상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라는 방대한 기록 속에 모두 기록돼 우리에게 전해진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의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를 보면, 화성 행궁의 낙남헌 앞마당을 가득 메운 노인들의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정조는 이날 영의정 홍낙성을 비롯한 전직·현직 관료 15명뿐만 아니라, 화성부의 사서(士庶) 노인 384명을 초대했다 . 신분 질서를 강조하며 왕을 견제하던 사대부 세력들에게 던진 파격적인 메시지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의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의궤의 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이다. 양로연에 참석한 노인들의 명단은 물론, 그들에게 하사한 물목까지 낱낱이 기록돼 있다. 정조는 노인들에게 비단 한 필과 비둘기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명아주 지팡이(청려장), 그리고 지팡이 끈으로 쓸 명주 한 필을 하사했다 . 실록은 정조가 노인들을 맞이하기 위해 친히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군신(君臣)의 예보다 경로(敬老)의 예를 앞세웠음을 전한다 . 이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갇혀 있던 벽파의 논리를 ‘효(孝)’와 ‘경(敬)’이라는 더 큰 가치로 압도한 것이었다. 

의궤에는 또 하나의 인상적인 그림이 실려 있다. 바로 화성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장면을 그린 ‘신풍루사미도(新豊樓賜米圖)’다 . 정조는 윤2월 13일과 14일 이틀에 걸쳐 화성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의궤 권5 ‘진휼’ 항목에는 당시 쌀을 받은 백성의 수가 5,300여 명에 달하며, 배급된 쌀의 양과 집행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

◇‘원행을묘정리의궤’ 의 ‘신풍루사미도(新豊樓賜米圖)’

정조에게 효(孝)는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통치의 원리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바치는 효심이 백성을 향한 사랑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왕의 권위는 정당성을 얻는다고 믿었다. 그는 행차 비용 중 남은 10만 냥을 ‘을묘정리곡’이라 명명하고, 이를 전국의 군현에 배포하여 백성들의 삶을 돌보게 했다 . 의궤는 이 쌀이 어떻게 관리되고 배포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까지 담고 있어, 단순한 행사 기록을 넘어선 ‘민생 매뉴얼’의 성격을 띤다.

정조는 기록을 통해 자신의 통치가 어떻게 백성에게 닿았는지를 기록했다. 양로연에 참석한 노인들의 명단, 백성들에게 나누어준 쌀의 양, 축제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노고를 낱낱이 기록한 것은 “이 축제의 진짜 주인공은 백성”이라는 선언이었다. 을묘원행은 정조에게는 민국 사상이 실현되는 실험실이자 이상향이었다. 그리고 ‘원행을묘정리의궤’는 그 실험의 성공을 알리는 보고서였다.

우리가 오늘날 정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겨둔 정밀한 기록 덕분이다. 정조는 기록을 통해 자신의 시대를 완성했고, 그 기록은 다시 우리의 시대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있다. 의궤 속에 담긴 1,700여 명의 음식 기록, 수천 명의 행렬 배치도, 그리고 백성들에게 나눠준 쌀 한 톨의 무게에 이르기까지, 이 방대한 데이터는 정조가 꿈꿨던 ‘대동(大同)의 세상’이 결코 허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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