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은 강물 같고, 입양은 우물 같다는 말이 있다. 강물은 저절로 흐르지만 우물은 누군가의 손으로 길어 올려야 한다. 그래서 입양은 늘 제도의 온도에 민감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도 “아이를 버리는 것은 가난보다 무관심 때문”이라 적었고,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고아를 거둔 집안을 공동체의 기둥으로 대접했다. 그런데 지금 강원자치도의 입양 현실은 거꾸로 흐른다. 지난해 7월 ‘국내입양에 관한 특별법''이 전면 시행되었지만 도내 입양전문기관과 교육기관은 전무하다. 국가가 책임지겠다며 깃발을 들었지만 정작 현장에는 안내판조차 희미하다. 법은 생겼는데 길은 끊겼고, 제도는 출범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를 품겠다는 마음보다 서류와 거리, 기다림이 먼저 앞을 가로막는다. ▼‘호사다마(好事多魔)''는 좋은 일일수록 마가 끼기 쉽다는 경계의 말이다. 입양 국가책임제 역시 출발의 명분은 옳았다. 민간 중심의 불투명한 구조를 손질하고 국가가 보호의 울타리를 치겠다는 취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원 현실은 이상과 정반대다. 예비 부모들은 서울행 KTX에 몸을 싣는다. 상담 한 번, 조사 한 번 받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비용을 감당한다. 문의를 해도 담당자는 없고, 절차를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모호하다. 책임은 국가가 진다는데 체감은 개인이 견딘다. ▼측은지심은 사람의 본성이라고 하지만 본성도 길이 막히면 발걸음을 멈춘다. 최근 5년간 강원자치도 가정 입양이 15건에 그쳤다는 사실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해마다 보호대상아동은 수십명씩 발생하는데 아이들은 가정보다 시설로 향한다. 서울·부산·대구·광주에 집중된 입양 조사기관 체계 속에서 강원자치도는 사실상 지도 밖 땅이 됐다. ▼입양은 누군가를 데려오는 일이 아니다. 한 아이의 외로움에 불을 켜는 일이다. 그래서 국가는 법률만 만들 것이 아니라 손이 닿는 체계를 세워야 하지 않을까. 거점형 지원센터든, 기존 아동보호기관의 기능 확대든 강원 현실에 맞는 숨통부터 틔워야 할 때다.
권혁순논설주간·hsgwe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