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일보 모바일 구독자 300만
인물일반

얼굴을 지우자 삶이 보였다⋯김진열이 관조한 ‘평범한 이들의 존엄’

읽어주는 뉴스

형상미술가 김진열 작가의 ‘원주 40년을 회고하다’ 展
평범한 이웃들의 몸짓에 담은 생명과 희망 메시지 전해
섬에서 구한 폐자재에 새 생명 넣는 형상미술 세계 선봬

◇원주 치악예술관 전시실에서 ‘원주 40년을 회고하다’를 주제로 개인전을 진행하고 있는 김진열 작가. 그는 작품을 통해 평범한 시민의 모습에서 존엄성을 찾고자 했다. 원주=허남윤기자

“모든 삶은 위대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든 것에는 존엄성이 배어 있습니다.”

원주를 대표하는 형상미술가 김진열 작가의 작품 세계는 인간의 몸짓과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출발한다. 원주 치악예술관 전시실에서 ‘원주 40년을 회고하다’를 주제로 개인전을 진행하고 있는 작가는 원주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신작 284점을 새롭게 펼쳐보였다.

그림 한 장 한 장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담겼다. 그림 속 인물들의 얼굴은 아크릴로 짓이겨진 탓에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대신 구부정한 어깨와 걸음걸이, 손짓과 자세를 통해 어떤 상황인지, 어떤 마음일지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김 작가는 “사람들은 얼굴이 보이면 표정에만 시선이 집중된다”며 “얼굴을 지워야 몸이 살아나고, 비로소 몸 전체를 통해 그 사람의 삶과 존엄을 바라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진열 작가의 연작인 '원주시외버스터미날 사람들'

작품 속 인물들은 정치인이나 유명인이 아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시장 골목을 오가는 주민들, 동네 어귀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이웃들이다. 그는 “누구나 자기 삶에서는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며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곁의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그의 작품 뒤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수평선 역시 중요한 상징이다. 강릉 옥계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바라본 동해의 수평선에서 위안과 희망을 얻었다고 한다. 김 작가는 “도시 사람들이 휴일이면 바다를 찾는 것도 결국 탁 트인 수평선에서 쉼과 새로운 힘을 얻기 때문”이라며 “내가 사랑하는 바다의 풍경 속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전시장 한편에 마련된 설치 작품도 눈길을 끈다. 녹슨 철판과 폐자재, 버려진 자재들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남 여수 앞바다의 섬 ‘연도’에서 수집한 폐금속과 산업 폐기물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작품으로 구현한 것이다.

김 작가는 “녹슨 철판의 결이 나무의 나이테나 사람의 피부와 닮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며 “버려진 것들을 작품으로 되살리는 과정 자체가 부활이자 재창조”라고 해석했다. 특히 관람객들이 실제 나무라고 착각하는 작품 상당수는 두꺼운 종이를 여러 겹 잘라 붙인 뒤 채색 작업을 거쳐 완성됐다.

◇김진열 作 '학살의 세월'. 전남 여수 앞바다에 있는 섬 '연도'에서 구한 폐자재에 숨을 불어넣은 심정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는 “종이와 폐자재를 활용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이 작업의 중요한 의미”라며 “죽은 것처럼 보이는 재료들도 예술을 통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작품 세계의 바탕에는 원주가 오랫동안 이어온 생명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의 인연을 언급한 그는 “인간과 자연, 생명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작품의 근간”이라고 밝혔다.

얼굴을 지운 인물들은 결국 특정 개인이 아닌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실제로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 가운데는 “저 그림이 꼭 내 모습 같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원주시민의 모습을 작품으로 만든 김진열 작가. 그 역시 원주시민의 한사람이다. 원주=허남윤기자

김 작가는 “그림 속 사람들은 이름 없는 이웃들이지만 세상을 지탱하는 주인공들”이라며 “몸짓 하나하나에 담긴 삶의 무게와 존엄을 함께 느껴주셨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홍익대에서 그림 공부를 한 작가는 상지영서대 교수와 총장을 역임했다. 생명포스타연구소 소장과 생태공동체 문화살리기 숲과 마을 미술축전 준비위원장 등 원주를 기반으로 하는 생명운동에도 힘을 보탰다. 강원일보와 동아일보가 제정한 ‘제2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다.

◇김진열 작가가 관조하는 몸짓은 많은 예술인들에게 표상이 된다. 지난 7일 개막식에서 유진규 마이미스트가 '몸짓'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은 김진열 작가의 아들인 김성보 사진작가가 찍었다.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