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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일반

[문화단상]겨리로 밭가는 농부가 되어

이응철 강원수필문학회장

요즘 한 TV프로그램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 부부 간 말 못 할 서운함을 터놓고 발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소소한 부부의 갈등을 세대별로 유명인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외친다. 사전 가식이겠지하며 반신반의했지만 보면 볼수록 시끄러움 속에 공감을 자아낸다. 얼마 전 펜싱 부부의 이야기다. “남편이 귀가하면서 자꾸 길에 내다버린 물건을 들고 와 질색이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아파트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자꾸 버린 곳에 눈길이 간다. 이사 가면서 아파트 식구가 내놓은 구식 장롱, 먼지를 뒤집어쓴 수석, 나무뿌리로 만든 목공예, 골동품, 헌 서적들, 특히 우연히 주운 도자기 한 점이 마중물이 돼 어느새 50여점이 넘는 골동품 수집가가 됐다.

천성적으로 예술지상주의자임을 자처한다. 관심이 남달라 주방을 현대화하면서 내다버린 찬장 살강, 베니어판, 선반에 긴 목재, 칼이 원수이면서도 짝꿍인 부부 도마, 벽걸이 등이 시시때때로 나를 유혹한다. 처음엔 남이 쓰던 물건에는 악귀가 숨어 있다느니, 지저분하다고 질색하는 내자였지만 깨끗한 합판을 주워 멋진 작품으로 생명을 불어넣으니 어느새 동화돼 길 가다가도 합판을 보면 주워오곤 한다. 춘천 앞두루 시내버스 종점 아래, 신촌리 두 곳, 사암리, 우두동 다리 건너, 그리고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 쓰레기장을 노상 기웃거린다. 크기가 달라도 상관없다. 호화 장롱 안쪽에서 비바람 모르고 곱게 보존한 해맑은 선반이 최고의 캔버스가 된다. 규격을 조정한다. 거두리농공단지 아래 목공예를 전문으로 하시는 자연촌장님의 절단 원형톱 덕분에 늘 신세를 진다.

Recycling(재활용). 실제 이런 합판을 끌어안고 다니니 피부병이 단단히 나서 고생한 적도 많다. 피부과 원장이 무슨 직업이냐고 닦달하며 혹시 나무 목재 합판을 다루는 직이냐고 단박에 진단한다. 겉보다 하초(下焦) 속살이 아우성이라 혼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캔버스에 그린 분신 같은 수필화들은 주로 춘천문화원 2층, 김유정농협, 한의원, 교동·후평3동 주민센터, 우리 아파트 등 30여 곳에 내걸려 지나는 사람들에게 윙크한다. 특히 과일향이 나는 우리 현대2차 아파트는 전시대를 관리소에서 길목에 설치, 지나 다니는 500여세대의 주민들이 감상해 이제는 단골 팬이 제법 많다. 비나 눈이 와도 상관없다. 특히 이순이 넘은 낯모를 어르신들이 예전엔 문학소녀였다고 회억하시며 웃는 모습이 실로 보람차다.

얼마 전에도 내자와 방송국을 다녀왔다. 장애인의 정성어린 입체적 작품들이 와락 눈길을 끈다. 그림·삽화란 콩가루로 수필, 시, 명언의 찰떡에 묻혀 맛있는 인절미로 만든 내 작품은 어떤 평을 받을까? 예전 떡장사하시던 어머님의 손길이 내 손에 맴돌며 빛내주는데….

인생 이모작. 며칠 전 내 작품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겨리로 한쪽은 수필, 다른 한마리는 그림이란 두 마리의 소를 묶어 쟁기질하는 농부가 돼 남다르게 인생 후반기 고희(古稀) 밭고랑을 간다. 힘을 주는 문학회원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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