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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권혁순칼럼]정치지도자들의 산불피해지 방문이 외면 받는 이유

논설실장

대통령에서부터 총리, 장관 잇따라 현장 찾아

그러나 이재민 지원 후속조치 지연 불만 '폭발'

주민 위로 공감은 커녕 간극만 벌여 놓아

피해 입은 소상공인 시설은 지원조차 안 해

지도자들의 재난 및 사고지역 방문은 고통받고 있는 주민 위로는 물론 소통의 장이 된다. 2002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황태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죽음을 애도한 시민들의 행렬은 8㎞에 달했다. 대체 백한 살의 그에게 무슨 매력이 있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줄을 지어 경의를 표했을까.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군 폭격 현장에 나타난 그의 말은 국민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줬다. 즉, 독일군 폭격으로 버킹엄 궁의 벽이 무너졌을 현장에 나타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국민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독일의 폭격 덕분에 그동안 왕실과 국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얼굴을 더 잘 볼 수 있게 됐으니 다행입니다.” 그녀는 기지와 유머가 넘친 말로 위기를 뒤집고 실의에 찬 시민들에게 안심과 용기를 줬다(이어령, 말의 정치학, 2003). 폭탄보다 강한 말의 힘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바로 엘리자베스 황태후의 매력이요, 정치력이었던 셈이다.

9·11 테러의 폭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부시 대통령은 현장으로 달려가지 않고 네브래스카로 피신했다. 하지만 곧 잘못된 것을 알아차리고 뉴욕의 재해지로 달려가 확성기를 잡는다. 구조와 복구 작업을 하고 있는 군중을 향해 막 격려의 연설을 시작하자 멀리 떨어져 있던 소방대원 하나가 “무슨 소리인지 안 들려요”라고 외쳤다. 그때 부시는 그 자리에서 서슴지 않고 “난 당신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다.” 그리고는 “세계의 모든 사람이 당신의 소리를 듣고 있다. 그리고 이 빌딩을 폭파한 자들도 곧 우리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즉흥연설 장면은 CNN에서 되풀이되면서 많은 국민에게 감동을 줬고 그 직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인물로 부상한다. 엘리자베스 황태후가 물리적인 벽을 상징적인 벽의 의미로 바꿔 놓은 것처럼 부시는 소방대원의 목소리를 역시 상징적인 목소리로 바꿔 놔 위기를 역전시켰다. 국내에서도 대형사고가 터지면 유력 정치인들이 현장을 잇따라 방문한다. 그러나 큰 울림이 없거니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더 많았다. 정치인들이 참사 현장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덜떨어진 행태는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피격된 천안함 병사를 구하러 바다로 뛰어들었다 순직한 고(故) 한준호 준위 장례식장에서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그랬다. 그는 비서를 시켜 영정 앞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장례식장을 찾은 경기도 지방선거 후보도 노골적으로 기념촬영을 하다 구설에 올랐다.

이들은 천안함 영웅을 추모하러 간 게 아니었다. 국민적 추모 열기를 선거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너무나 뻔했다. 동해안 산불이 발생한 지난 4일 이후 대통령에서부터 국무총리, 그리고 각 부처 장관들이 잇따라 화재 현장을 방문했다. 시장을 방문해 물건을 직접 사기도 했다. 특별재난 지역 현장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위로하고 답을 찾겠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동해안 산불 발생 보름이 지났는데도 후속조치가 나타나지 않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특별재난지역의 영세사업장에 대한 복구비 지원 근거가 명시된 법률안 개정안이 국회에서 2년 넘도록 계류 중이어서 산불 피해지역은 직격탄을 맞고 있다. 재난으로 사업장이 전소되는 피해를 입고도 보상과 지원은 일절 못 받고 자력으로 복구해야 할 상황이다.

현행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따르면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면 주거용 건축물과 농림어업 시설물에 대한 피해 복구는 지원되지만, 소상공인은 자금 융자, 상환기한 연기 등 간접 지원만 받을 수 있고 피해 복구에 대한 직접 지원이나 피해금액 인정을 받을 수 없다. 2016년 12월 복구 지원 대상에 '소상공인 시설'을 포함시킨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의 재난 현장 방문은 다음 선거를 위한 이벤트 만들기인가.

주민들을 위로하고 고통에 공감해야 할 지도자들의 현장 방문이 오히려 주민과의 간극을 벌려놓고 있으니 지도자들의 재난지역 방문 매뉴얼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hsgweon@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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