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메트로폴리탄 뉴욕]못다한 이야기18.뉴욕 맨해튼을 관통하는 건축양식, 보자르

'에콜 드 보자르'의 유럽 유행사조 19세기 뉴욕에서 꽃 피워
웅장한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미국 대표 역사(驛舍)

건축이나 미학(美學)을 전공하거나 혹은 이 분야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뉴욕의 건축물들과 관련해 대다수 일반인이 발견하기 어려운 비밀이 하나 있다. 필자도 3년 정도 뉴욕에 살았어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다만 왠지 비슷하다는 느낌 정도만 받았을까? 그 비밀이란 건 바로 이들 건축물에 거의 일관되게 흐르는 특징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 특징이란 다름 아닌 오래된 건물들의 건축양식이 거의 같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아마도 공감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어쩐지 뉴욕에서 오래전 지어졌다고 하는 건물들의 느낌이 하나같이 비슷했는데 그게 그래서, 건축양식이 같아서 그랬던 거구나 하고 수긍하는 독자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뉴욕을 관통한다는 건축양식은 다름 아닌 19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예술사조, 보자르(Beaux Arts) 양식이다. 보자르는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그런 예술사조는 아니다. 말 그대로 19세기 한때 유행했던 스타일이고 20세기 들어 디자인과 공예, 건축 등에 예술과 기술을 혼합한 바우하우스(Bauhous) 양식이 대세가 되면서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양식이다. 보자르(프랑스어로 ‘예술’) 양식은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종합예술학교, ‘에콜 드 보자르(Ḗcole des Beaux-Arts)’를 중심으로 유행했던 예술사조여서 이름이 그렇게 붙은 것인데, 과거 그리스, 로마 시대의 미술과 건축을 이상향으로 보고 이를 추종했던 매우 보수적이고도 고전주의적인 유럽의 예술패턴을 말한다. 고딕, 바로크, 로코코양식을 중시하고 실용적 기능보다는 예술적 美나 완결성 등을 강조한다. 겉모습을 보았을 때 아주 고전적이라는 느낌이 들면 일단은 보자르 양식이구나 하고 추측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뉴욕 맨해튼에 보자르 양식이 널리 퍼진 건 맨해튼의 주요 건축물들이 설계되고 건축된 1880년부터 1930년까지 당시 미국의 젊은 건축가들이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았던 건축학교가 바로 프랑스 파리의 ‘에콜 드 보자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럽에서 한때 유행했던 예술사조가 막상 꽃을 피운 장소가 유럽이 아닌 미국 뉴욕이었던 셈인데, 이 사실만 보아도 19세기 미국인들이 얼마나 유럽 바라기를 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보자르 양식은 과거의 전통을 강조하면서 과거를 현재에 덧입히는 일종의 절충주의(eclecticism)라 할 수 있는데, 어떤 지역의 특색을 강조하는 로컬 양식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이고도 범세계적인 보편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보자르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은 웅장하고 화려하며 대중적인 美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대체로 비슷한 느낌을 주는데, 맨해튼의 오래된 건물들이 주는 느낌이 딱 그렇다.

◇그랜드센트럴

뉴욕 맨해튼에서 보자르 양식은 주로 도서관, 학교, 기념비, 철도역사 등 공공건물들에 적용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미드타운 42번 스트리트와 파크 애버뉴 사이에 위치한 대표 철도역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Grand Central Terminal), 브라이언 파크(Bryant Park) 옆 5번가에 위치한 뉴욕 공공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 등이해당된다. 특히 5번가 위쪽 센트럴파크 우측의 부촌(富村) 어퍼 이스트(Upper East) 지역에 보자르 양식 건물이 많은데, 우리가 잘 아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프릭 컬렉션, 유대인 박물관, 쿠퍼 휴이트(Cooper Hewitt) 뮤지엄(과거 철강왕 카네기가 살았던 집) 등 오래된 박물관들은 거의 보자르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보면 된다. 이 밖에도 모건 라이브러리 & 뮤지엄(JP Morgan의 창업자 J.Pierpont Morgan이 살았던 집), 뉴욕대 부근의 워싱턴 스퀘어 메모리얼 아치(Washington Square Memorial Arch), 컬럼비아 대학내 일부 오래된 건물들도 모두 보자르 양식 건물이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내부 홀(자료: New York City, Yesterday & Today)

그럼 여기서 뉴욕의 보자르 양식 건물 가운데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뉴욕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처음 보는 곳을 들라면 비행기라면 존 에프 케네디 공항, 기차라면 펜스테이션(Penn Station) 또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일 것이다. 이 3곳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게 느껴지는 건물이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인데, 화려한 석조건물 외관과 비현실적으로 높고 드넓은 내부 홀, 약간 어두운 조명 아래 내려놓은 거대한 성조기 등을 보고 있노라면 여기가 미국의 대표 역사(驛舍)가 맞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랜드 센트럴 외부 시계탑(자료: New York City, Yesterday & Today)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유래는 증기선과 철도왕 밴더빌트(Vanderbilt, Cornelius, 1794~1877)가 살았던 19세기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의 증기선과 철도 운행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던 밴더빌트는 1871년 맨해튼 동쪽까지 철도 노선을 늘리기 위해 뉴욕 미드타운 한복판에 철도역을 하나 짓는다. 이 건물이 지금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전신인 그랜드 센트럴 디폿(Grand Central Depot)이다. 20세기 들어 전기철도가 대량 보급되면서 뉴욕 내에도 철도 노선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는데, 이에 따라 대규모 철도 역사의 건축이 절실해졌고, 1913년에는 마침내 기존의 작은 그랜드 센트럴 디폿을 허물고, 지하에 복합 트랙이 교차하는 거대 철도 역사가 들어서게 된다. 이 건물이 지금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이다.

◇1930년대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자료: New York City, Yesterday & Today)

이 오래된 대형 역사는 지하의 철도와 지하철 트랙, 지상의 자동차, 보행 연결로가 복합적으로 연결된 종합터미널로 지금도 큰 무리 없이 매우 효율적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그 기능적 우수성도 인상적이지만 더 인상적인 건 역시 고풍스럽고 웅장하며 독특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건물 외관, 즉 보자르 양식 외관이다. 처음 그랜드 센트럴 역사 안에 들어서는 방문객이라면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역사의 높이가 아주 높은데, 천장을 올려 보면 마치 광활한 밤하늘 아래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실제 벽면의 높이가 자그마치 19.4미터(64피트)에 이르는 아치형 윈도우라고 하니 단층으로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높이이다. ‘지중해의 겨울밤(Mediterranean Winter’s Nignt)‘이라 불리는 역사 내부 홀의 천장에는 2,500개의 별 조각이 수놓아져 있는데, 그래서인지 내부는 늘 밤인 것처럼 조명이 어둡다. 밖에서 역사 외관을 잘 살펴보면 42번 스트리트 쪽 입구 위쪽에 4미터 높이의 시계가 보인다. 시계는 머큐리, 헤라클레스, 미네르바와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조각이 에워싸고 있는데, 이런 복고풍의 화려한 디테일들이 바로 보자르 양식 고유의 특징이다. 뉴욕을 둘러보면서 어느 건물이 보자르 양식인지, 혹은 새로 지어진 현대 양식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역사적 이해와 재미를 곁들인 흥미로운 관광 포인트가 될 수 있다.

최재용 한국은행 강원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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