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일반

“족패천하…두 발로 세계를 지배한 대한민국”

강원일보 창간 80주년 특별기획 [1950 KOREAN WIN]
1947년 춘천 손기정-함기용 운명의 만남, 마라톤 입문
미군 타이어로 만든 신발 신고 매일 서울 북악산에서 연습
세계 최초 국제 마라톤대회 한 국가 1·2·3위 석권 대기록
47년 백범 김구 쓴 ‘족패천하’ 1950년 보스턴에서 현실로

◇1950년 보스턴 마라톤을 휩쓴 춘천 출신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사진 왼쪽부터) 선수가 현지 호텔에서 축배를 들고 있다. 강원일보DB

1936년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1947년 서윤복 선수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 1992년 황영조 선수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대한민국 마라톤은 항상 가장 극적인 순간에 가장 감동적인 방식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갔다. 1950년은 6·25전쟁이 발발한 해였던 탓에 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세계를 휩쓴 날이자 제마라톤 대회에서 한 나라가 1·2·3위를 휩쓴 초유의 날이었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출전 당시 송길윤, 최윤칠, 손기정 감독, 함기용(사진 왼쪽부터). 강원일보DB

■1947 손기정-함기용 운명의 만남=1930년 춘천시 동내면 사암리에서 태어난 함기용은 춘천사범학교를 다니던 중 육상부에 뽑혔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은 민족의 영웅이었다. 해방 직후 그의 일대기를 담은 기록영화 ‘민족의 제전’이 전국을 순회 상영했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2년 간 전국 순회 상영을 통해 마라톤 유망주들을 찾아다녔다. 1947년 춘천 상영회에서 손기정은 함기용을 보고 “달리는 폼이 좋다. 장래가 있겠다”고 칭찬했다. 이날의 만남은 함기용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그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손기정의 모교인 양정고에서 입단테스트를 받고 2학년으로 전학했다.

함기용은 당시를 회상하며 “젊은 혈기에 세계적인 인물이 되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제2의 손기정이 되보자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당시 세계 각국의 선수들과 훈련 중인 함기용 선수. 강원일보DB

■1948 런던의 좌절과 국민들의 분노=1948년 함기용은 열일곱의 나이에 국가대표 후보에 뽑혀 런던올림픽에도 참가했다. 다만 정식 국가대표인 서윤복, 최윤칠, 홍종호에 밀려 출전은 하지 못했다. 1947년 서윤복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으로 국민들의 기대가 컸지만 아무도 입상하지 못했다. 특히 최윤칠 선수는 38㎞까지 1위로 달리다 갑작스런 근육경련으로 기권했다. 귀국 후 당시 마라톤 선수들은 숨어서 훈련해야할 정도로 비난에 시달렸다.

함기용은 일평생 1948년을 안타까워 했다. 그는 “희망이 크면 실망이 큰 법이다. 최윤칠 선수는 기권을 하고 서윤복 선수는 25위, 홍종호 선수는 27위를 했다”며 “런던에 갈 때 배 타고 가다 홍콩에서 비행기를 타고 지중해를 경유해 18일이 걸렸다. 멀미하고 갑판 위에서 훈련하고…이미 기진맥진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가장 어린 함기용은 컨디션에 자신이 있었다. 그는 “당시 남승룡 감독이 후보인 나를 출전시키는데 부담이 있었는데, 나중에 후회했다”며 “그때 나를 뛰게했다면 색깔은 몰라도 메달을 가져왔을 것”이라고 솔직히 털어놨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을 제패한 함기용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 시내 곳곳에 내걸린 현수막. 사진=양정고 제공

■미군 타이어로 만든 마라톤화=함기용은 손기정의 지도로 서울 삼청동에서 북악산 정상을 매일같이 뛰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1947년 보스턴마라톤 우승자 서윤복도 이곳에서 연습했다.

가난한 나라에서 마라토너로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변변한 신발 조차 구할 수 없어 미군부대에서 나온 타이어와 천막을 이용해 직접 신발을 만들어 신을 정도였다. 함기용은 “미군 군인들 천막 버린 것을 잘라다가 미군 타이어를 얇게 오려 신발 바닥을 만든 진짜 수제화를 신고 뛰었다”며 “뛰고나면 발이 붙어버리고 발톱도 몇번을 빠졌는지 모른다. 고단하고 피곤하니까 소변도 핏물”이라고 회상했다. 그리곤 “세계적인 선수가 되려면 머리로 뛰어선 안된다. 다리로 뛰어야지”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습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 그 선수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함기용의 골인 순간. 강원일보DB

■‘상심의 언덕’에서 세 번을 멈춰서다=1950년 4월19일 보스턴의 날씨는 흐리고 안개가 잔뜩 끼었다. 스타트라인에 선 14개국 131명의 선수들 중에는 함기용 최윤칠 송길윤 대한민국 대표 세 선수가 있었다. 18㎞지점까지 미국, 캐나다 선수, 핀란드 선수들과 대힌민국 대표팀 에이스 최윤칠 선수가 선두그룹을 형성했다. 막내 함기용은 금세 그들을 따라 잡았다. ‘최 선배, 괜찮소?’ 함기용의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함기용은 당시를 회상하며 “무턱대고 달렸어. 미국, 캐나다, 핀란드, 한국 선수가 보이더라고…최 선배의 얼굴에 땀이나서 소금 꽃이 활짝 피고 피로해보여서 먼저 앞질러 나갔지”라고 말했다.

25㎞ 지점 이후 단독 선두로 나선 함기용 역시 큰 위기를 맞았다. 32㎞ 지점부터 시작된 ‘상심의 언덕(Heart Break Hill)’에서 부터다. 마치 심장이 파열될 것 같다는 가파른 고갯길이다. 38㎞ 이후부터 그는 세 번이나 걷다가 다시 뛰기를 반복했다. 함기용은 초조했다. 그는 “발이 땅에서 안 떨어져. 그 순간 누가 휙 지나갔으면 털썻 주저앉았을거야(웃음)…근데 아무도 못 쫓아와”라고 말했다. 끝내 아무도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만큼 차이를 많이 벌린 것이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출전을 앞두고 함께 훈련 중인 한국 마라톤 대표팀. 송길윤, 최윤칠, 함기용(사진 왼쪽부터) 사진=양정고 제공

■1950 대한민국의 ‘보스턴 Sweep=결국 함기용은 2시간32분39초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보스턴 현지 언론에서는 그를 워킹챔피언(Walking Champion)이라고 소개했다. 조롱이 아닌 그만큼 압도적인 차이로 우승했다는 찬사였다. 함기용이 우승을 차지한 지 3분19초가 지난 후 2위가 골인했다. 대한민국의 송길윤이었다. 이어 3위는 대한민국의 맏형 최윤칠이 차지했다.

손기정 감독은 자서전에서 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 대해 “보스턴 하늘에는 태극기만이 가득했다”고 썼다.

함기용 역시 “우리 세 명이 정말 엄청난 일을 해냈다. 한 나라 선수가 1,2,3위를 석권한 것은 세계마라톤사에 첫번째로 일로 기록됐다”고 말했다.

1947년 서윤복 선수가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백범 김구 선생은 족패천하(足覇天下)라는 글귀를 써 선물했다.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백범의 글은 3년 뒤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에 의해 현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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