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홍섭의 바다 편지]천진, 소년, 그리고 시인 이성선  

이홍섭 시인

지난 인연들을 돌이켜보면, 이름만 떠올려도 명치 끝을 아프게 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성선 시인(1941~2001)이 그런 분입니다. 시인과의 개인적 인연을 반추해보아도 그렇고, 시인의 삶과 시 세계를 생각해보아도 그렇습니다.

새해 첫 달에 아픈 명치를 누르며 천진 바다를 찾은 것은 이성선 시인이 이곳 해변에서 가까운 천진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입니다. 봉포해변과 청간정해변 사이에 자리한 천진해변은 이름 그대로 ‘천진’한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딱 좋은 크기와 안온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인은 학교가 파하면 청간정에서 놀다가 집으로 가곤 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봉포, 천진, 청간정 바다가 소년의 가슴에 넘실댔을 것입니다.

이 어린 소년의 집은 이곳에서 내륙으로 5킬로를 들어가야 닿을 수 있는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의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시인은 이곳을 “금강산 줄기가 남으로 이어지다가 마지막 우뚝 솟은 봉우리, 설악산 줄기가 북으로 뻗으며 만나는 신선봉 아래 산골 마을 하늘 밑 첫 동네”라고 정성스럽게 묘사했습니다. 시인은 이곳에서 “죽도록 외롭고 죽도록 아름다운 시간”을 온몸으로 흡입했습니다. “소가 혀끝으로 반달을 핥는/ 추녀 밑으로 밤이 자꾸 깊다./제사도 없다. 오는 사람도 없다./ 작은 산들이 풀잎에 거꾸러져 잠들고/ 개구리 울음만 아득히 별을 먹는다./ 죽도록 외롭고 죽도록 아름다운 시간/ 고향집 문살에는 달빛만 우련하다.”(「고향집 밤」)

이성선 시인은 우리 문학사에서 동양 정신에 기반한 ‘정신주의 시’를 추구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의 삶과 시의 기저에는 위의 시에 나타난 것처럼 제사도 없고, 오는 사람도 없었던 슬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술 연보에 따르면, 시인은 “6.25 때 부친이 북으로 가시어 모친 아래서 성장”했으며, “문과대학에 가고 싶었으나 모친의 강권으로 고려대 농학과에 진학”했습니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 비추어볼 때, 소년이 성장할 때까지 처했던 상황은 모진 천형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시인이 하직을 앞두고 “여기 쓸모없는 일에 매달린/ 시대와는 상관없는 사람”(「노을 무덤」)으로 자신을 정의한 근저에는 이러한 슬픔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소년은 하늘 밑 첫 동네에서 천진초등학교까지 5킬로를 혼자 걸어 다녔습니다. 속초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이 거리가 더 늘어나 왕복 70리가 되었습니다. 집을 나서 2킬로 정도 가면 비로소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시인은 이 길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먼길을 걸어 다니며 이때부터 나는 자연과 말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 혼자 다니는 길이라 새벽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풀의 이슬이나 나무 그리고 해와 달과 별, 이들 아니면 나와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미 중학교 때부터 하늘의 기색만 보면 하루 날씨를 저절로 예상할 줄도 알게 되었다.” 소년 때부터 걸었던 이 길들이 그를 ‘강원도 대표 시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길에서 본 장중한 설악산과 금강산, 그리고 아름다운 동해가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강원 문단은 시인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시인은 13권의 시집을 통해 강원도 곳곳을 환하게 비추었고, 지난 1981년부터 무려 18년 동안 ‘물소리 낭송회’를 진행하면서 강원 문단의 등대가 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의 수많은 시인을 초대한 물소리 낭송회는 시인과 시인, 시인과 독자 간 설레는 교감의 장이었습니다. 당시가 강원 문단의 황금기였고, 그 중심에 이성선 시인이 있었습니다. 지난해 드디어 고성군에서 ‘제1회 이성선 문학축전’이 열렸다고 합니다. 늘 안타까웠는데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성선 시인은 시를 쓴 분이 아니라 ‘온몸으로 시를 산 분’이었습니다. 저는 시인이 고향인 “하늘 밑 첫 동네”에서 “죽도록 외롭고 죽도록 아름다운 시간”에 사무쳤었기 때문에 그 힘든 길을 갈 수 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올해 2회째를 맞는 ‘이성선 문학축전’이 부디 장수하기를 이곳 천진 바다에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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