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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강원의 인물]박수근

 예술이 길다는 것은 시대를 초월해 공감할수 있기 때문이다. 양구출신 朴壽根(박수근·1914~1965)이 그렇다.

 朴화백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그가 남긴 작품과 예술정신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농익은 감동을 전해주기 때문이다.『가장 한국적인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실례를 입증해 주는 작가가 바로 朴수근화백이다.

 지난 95년 미국 뉴욕 소더비경매장에서 있었던 미술품 경매에서 그가 작고하기 1년전인 64년도 작품 「냇가에서 빨래하는 네여인(가로32.1 세로14.9㎝)」이 당초 예상가인 15만~20만달러를 크게 웃도는 31만500달러에 팔렸다.

 이렇듯 朴화백은 국내에서 보다 오히려 외국에서 더 높이 평가받고 그 명성이 역수입된 작가다. 또한 생전에 생활비 마련을 위해 그림을 팔고자 했을때도 미국 일본인 등이 선뜻 작품을 매입한 작가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체취가 물씬 배어 있는 그림이 외국인들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졌고 독특한 문화를 함축하고 있는 그림으로 보여졌기 때문일까. 마치 피카소가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생활풍습에서 영향받아 「큐비즘」이라는 독특한 미술양식을 창조해 냈듯이 말이다.

 朴수근화백은 1914년 2월21일(음력1월28일) 양구군양구읍정림리에서 朴형지씨와 尹복주씨의 3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양구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2살때 프랑스의 농민화가인 밀레의 작품 「만종」을 보고 감명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전해온다. 이미 아버지가 광산사업에 손댔다가 실패해 중학교 진학이 어렵게 되자 그는 혼자서 산과 들로 다니며 스케치와 수채화 독학을 했다.

 18세때인 1932년 제14회 「鮮展(선전)」에 수채화 「봄이 오다」가 입선, 용기를 얻고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그러나 3년뒤 오랫동안 투병중이던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박수근은 춘천에서 최악의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 그림에 정진한다. 1936년부터 「일하는 여인」 「봄」 「농가의 여인」 「麗日(여일)」 등이 4년 연속해서 입선, 작가로서의 기량을 선보였다.

 26세 되던 40년 지금은 북강원인 금성에서 춘천여학교(현 춘천여고)를 나온 金복순씨와 결혼했고 잠시 평양에서 미술활동을 했다. 해방이 되자 가족이 있던 금성으로 돌아와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6·25전쟁 이후 남하해 서울에 정착한 박수근은 39세인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집」이 특선되고 「노상에서」가 입선, 주목받는 작가로 떠오른다.

 그러나 여전히 미8군 PX에서 초상화등을 그려주며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간다. 이 시절 함께 근무했던 朴완서씨가 훗날 그를 모델로한 소설 「裸木(나목)」을 발표해 문단에 데뷔하는 계기가 된다.

 58년 44세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동서미술전」에 참가, 해외에 첫선을 보였고 이듬해에는 국전추천작가, 48세에 국전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으나 백내장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는 불행을 맞는다.

 朴수근화백은 필연적으로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가난과 화단의 패거리 행위에 격분해 음주로 분을 삭이곤 했는데 그로 인해 간경화가 심해져 급기야는 65년 5월6일 5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우리의 현대사가 낳은 예술인으로서의 상징인 朴수근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충실히 따랐지만 그의 이승에서의 삶은 결국 불행했다.

 그의 그림은 기교가 없는 소박함이 매력이고, 그 속에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다. 한국의 가난함은 한 시대의 현실이었다. 그런가운데서도 박수근이 눈길을 준곳은 명동을 배회하던 시인·화가·지식인들이 아니라 그가 어릴적 보았던 강원도의 순박한 이웃들과 풍경, 말년에 살던 서울 외곽 창신동 뒷골목 풍경속의 인물이었다.

 朴수근은 경기도포천군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안장됐고 작고한 65년 10월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첫 유작전이 열렸다. 78년 묘역에 畵碑(화비)가, 90년에는 양구군양구읍 비봉공원에 동상이 세워 졌다.

 지난 95년 朴화백의 30주기를 맞아 영인본을 제작해 지역에 보급하기도 했던 양구군은 지난해 10월 논으로 변한 정림리 생가터 일대 5,000평을 매입해 생가복원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인근 군유지 임야 4,000평을 편입해 「박수근그림동산」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밝혀 놓고 있다.

 任璟淳(임경순)양구군수는 『양구군의 정신적 토대이자 자산인 만큼 박수근선양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본격적인 사업을 펼쳐 나갈 계획』이라며 『오는 3월초 유족과 지인 전문가등 각계 관련 인사들이 참여하는 준비위원회를 구성할것』이라고 했다.

 高승길양구군문화예술계장은 『3개년 사업으로 총 15억원이 투자되는 생가복원사업등은 지역의 최고명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강원일보는 지난 87년 10월24일부터 88년 12월28일까지 27회에 걸쳐 「박수근화백의 생애와 예술」 특집 시리즈를 기획, 매회 전면컬러로 朴화백을 재조명 했었다. 또한 「월간太白」을 통해 고향인 양구지역 朴수근 관련 인사와 유적지등을 상세하게 소개했고 95년에는 미공개 작품 소개와 호주에서 일시 귀국했던 장남 城男(53)씨, 인도 뉴델리미술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장손 振興(진흥·29)씨를 인터뷰해 단독보도하기도 했다.

 강원일보사는 朴화백의 생일인 오는 21일 전문가와 유족 선양사업 관련자들을 초빙, 박화백의 업적을 재평가해 보고 양구 주민들과 지역관광을 연계할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세미나를 열 예정 이다.<龍鎬先기자·yonghs@kangwon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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