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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북한강포럼·칼럼]평화생명, 강원도, 북한강

안봉진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고대사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각각의 시대적, 공간적 상황에 따라 내건 명분과 이유를 바꾸어 가며 끊임없이 전쟁을 해왔다.

 20세기 초반 사라예보의 총성에서 시작되어 전세계적 차원의 전쟁으로 비화하기 시작한 최근의 양상은 그 후 혁명과 이데올로기를 위한 전쟁으로 바뀌어 이어져 오다가 한반도 허리 휴전선에서 마지막 흔적을 남기고 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한 이후로도 인류사회는 신자유주의든, 근본주의든, 화석연료 문명이든, 그 원인을 어디서 찾든 간에 역시 전쟁을 이어 오고 있다.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대형 건물이 테러로 붕괴되어 무고한 다수의 사람들이 죽고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한 거대 군사력이 순식간에 광활한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모습, 무고한 사람들이 잔인하게 참수당하는 장면 등이 현대문명의 발달한 매체를 통하여 전 세계에 여과 없이 전달되고 있다.

인간 본성에 상존하는 이러한 잔인함과 전쟁에 대한 충동은 단 한번 단추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호모사피엔스의 절멸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위험한 형국을 만들고 있다.

 한편 인류사회는 산업화를 시작하면서 이미 몇 세기 전부터 자연과의 불화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노자가 갈파한 것처럼 천지(天地)는 불인(不仁)이어서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는 수많은 자연재해와 전지구적 이상징후를 동반하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전쟁과 자연의 이상징후로 대표되는 현대문명의 현상은 반평화, 반생명적인 상황에 놓여 있으며 이와 같이 전도된 문명현실은 우리시대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문명은 이러한 증오와 파괴의 현실로부터 평화와 생명을 지향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문명의 파괴적 속성의 근저에 놓여있는 기계론적 이원론이나 물질주의의 대척점에서 자연에 대한 일원론과 온생명과 상생을 도모하던 동아시아의 정신사조가 있다고 믿는다.

 한반도는 전 세기에 인류의 증오가 남겨놓은 퇴적물을 허리에 감고 있다. 이 퇴적물을 걷어내는 일은 지난 인류 역사의 증오에 희생된 생명에 대한 씻김굿이요, 새로운 문명의 시발점이다. 그 한반도의 가운데에 증오의 퇴적물을 안은 채 강원도가 놓여있다.

 그러므로, 강원도의 전망과 비전의 시작은 평화와 생명에 대한 지향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강원도는 동쪽으로 동해를 두르고, 백두대간의 줄기를 이어가고 있으며 여전히 한반도의 정치 경제 문화 권력의 상징인 한강의 상류를 이루는 북한강과, 20세기 이데올로기와 증오의 침전물인 DMZ를 가지고 있다.

 강원도를 둘러싼 자연적, 인문적 환경과 조건은 그것이 인류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의 지역적 투영인 한, 그것에 대한 우리의 성공적 해석과 전망은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넘어 글로벌한 보편성을 획득할 것으로 믿는다. 지구적 차원의 지향을 갖되 지역적으로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은 이미 보편화된 행동준칙이다. 모름지기 이러한 고민은 지역의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문제의식의 시작으로 북한강의 합수머리에서 길을 찾아보려 한다. 한반도의 심장인 한강과 그 본류인 북한강에서 그 유역의 삶은 상류와 하류가 어떻게 소외되어 있는지, 강과 인간은 어떻게 관계 맺어 왔으며, 강을 둘러싸고 우리들은 어떤 문화 가치 역사들을 엮어가고 있는지에 관해서…. 또한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는 바람직한 유역의 생태공동체는 가능한지, 등등의 상상력을 따라 그 길을 걷고자 한다.

 1921년 1월 중국의 노신(魯迅)은 자신의 단편소설의 끝머리에서 이렇게 되뇌었다. “사실 말이지, 길이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안봉진(평화생명회의 공동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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