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정이 1936년 월간‘조광’5월호에 기고한 ‘오월(五月)의 산골짜기’에 당시 마을 풍광과 주민들의 심성과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20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찍굵찍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득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푹한 떡시루같다 하야 동명(洞名)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씨러질듯한 초가요 그나마도 50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그러나 산천의 풍경으로 따지면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귀여운 전원(田園)이다.
산에는 기화이초(奇花異草)로 바닥을 틀었고, 여기저기에 쫄쫄거리며 내 솟는 약수도 맑고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에서 골골거리며 까치와 시비를 하는 노란 꾀꼬리도 좋다.
주위가 이렇게 시적(詩的)이니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데인가 시적이다.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하는 그들을 대하면 딴 세상 사람을 보는 듯하다.
벽촌이라 교통이 불편하므로 현사회(現社會)와 거래가 드물다.
편지도 나달에 한 번씩 밖에 안 온다.
그것도 바달부가 자전차로 이 산골짝직까지 오기가 괴로워서 도중에 사람을 만나면 편지 좀 전달해 달라하고는 도루 가기도 한다.
이렇게 도회(都會)와 인연이 멀음으로 그 인심도 그리 야박하지 못하다.
물론 궁한 생활이 아닌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악착한 행동을 모른다.
그 증거로 아즉 나의 기억에 상해사건으로 마을의 소동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그들이 모이어 일하는 것을 보아도 퍽 우의적이요 따라서 유쾌한 노동을 하는 것이다.
5월쯤되면 농가에는 한창 바쁠 때이다.
밭일도 급하거니와 논에 모도 내냐 한다.
그 보다도 논에 거름을 할 갈이 우선 필요하다.
갈을 꺾는 데는 갈잎이 알맞게 퍼드러졌 을 때 그리고 쇠기 전에 불라살야 꺽어나려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일시에 품이 많이 든다.
그들은 열아문씩 한떼가 되어 돌려가며 품아시로 일을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일의 권태를 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의 능률까지 오르게 한다.
갈때가 되면 산골에는 노유(老幼)를 막론하고 무슨 명절이나처럼 공연히 기꺼웁다.
왜냐하면 갈꾼을 위하야 막걸리며, 고등어, 콩나물, 두부에 이밥- 이렇게 별식(別食)이 버러지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산골에는 잔디도 좋다.
산비알이 포근히 깔린 잔디는 재물로 침대가 된다.
구우에 바둑이와 까치 벌룽 자빠져서 묵상하는 자미도 좋다.
여길보아도 저길 보아도 우뚝우뚝 섰는 모조리 푸른 산이메 잡음 (雜音)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런 산속에 누워 생각하자면 비로소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요히 느끼게 된다.
(중략)
그리고 갈 때 전후하야 송아(화)가 한창이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적이면 시냇 면(面)에 송아가루가 노랗게 엉긴다.
아낙네들은 기회를 타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산으로 송아를 따러 간다.
혹은 나무위에서 혹은 나무 아래에서 서루 맞붙어 일을 하며 저이도 모를 소리를 지꺼리다는 포복졸도할 듯이 깔깔대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5월 경 산골의 생활이다.
산중턱에 번듯이 누워 마을 의 이런 생활을 나려다 보면 마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물론 이지(理知) 없는 무식한 생활이다마는 좀더 유심히 관찰한다면 이지없는 생활이 아니고는 맛볼 수 없을 만한 그런 순결한 정서를 느끼게 된다.
내가 고향을 떠난지 한 4년이 됐다.
그동안 얼마나 산천이 변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금쟁이의 화를 아즉 입지 않은 곳이매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變)은 없으리라.
내내 건재하기 바란다.”
전형적인 농촌, 순박한 사람들.
김유정이 증언한 당시 실레마을은 상해사건으로 마을의 소동을 일으킨 적은 없었던 곳이고, 도회(都會)와 인연이 멀어 인심도 그리 야박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금쟁이의 화를 아즉 입지 않은 곳이매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變)은 없으리라”고 적었듯이 근대화가 아직 미치지 않은 순박한 곳이었다.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김유정의 글, 그의 문학을 치켜세우는 이유다.
떡시루처럼 옴푹해 아늑하기만 했던 실레마을.
대룡산 어깨에서 흘러내린 산줄기, 금병산(652m)이 병풍처럼 감싸안은 마을 이 골, 저 마루턱에 산재해 있던 50여호는 대부분이 김도사댁 소작인들이었다.
그 김도사댁의 주소는 춘천부 남내이작면 427번지, 동남향 야트막한 언덕위에 앉아 있던 30여칸 기와집이 김도사댁이었다.
구한말, 20세기에 들어서 여덟번째 해가 열린 1월11일(음력), 정월대보름을 나흘 앞둔날 아침부터 김도사댁 하인들이 부산히 움직였다.
김도사댁 며느리, 김참봉 부인의 해산날이었다.
용호선기자 yonghs@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