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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김유정 탄생 100주년]<5>‘멱설이’ 김유정

재물과 복 가득 쌓이라고 별칭 불러

첫아들(김유근) 이후 내리 딸만 다섯을 낳은 김도사댁 며느리 청송심씨는 이번에는 반드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병풍처럼 실레마을을 싸안은 금병산 호랑바위와 장사바위에 치성을 올리며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꿈에서 금병산 산신령으로부터 현몽을 받았다. 그 산신령께서 청송심씨에게 아기장수를 안겨주었다. 그런데 그 아기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있었다. 무슨 징조인지 궁금했지만 심씨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태몽은 맞았다. 심씨는 소원했던 아들을 낳았다. 간절히 원했던 아들이었기에 집안의 복덩이로 귀하게 여겼다. 집안에서는 그 아이를 ‘멱설이’라고 불렀다.

‘멱설이’는 ‘멱서리’의 된소리다.
‘멱서리’는 볏짚으로 촘촘하게 엮어 만든 짚그릇이다.
곡식이 가득 담기는 멱서리처럼 재물과 복이 가득 쌓이는 인물이되라는 뜻에서 귀하게 얻은 아이에게 ‘멱설이’라는 별칭을 붙인 것이다.

그 ‘멱설이’가 김유정의 아명(兒名)이다.

유정의 집안에서는 그렇게 ‘멱설이’라고 불렀고 두룸실(학곡리) 외가에서는 이 아이를 ‘먹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는 등 먹성이 좋다고 해서 멱색이(‘먹색이’의 된소리)라고 불렀던 것이다.

김유정이 어린시절 덩치가 크고 먹성이 좋았다는 것을 이 별칭으로 알 수 있다.

김영기(전 강원일보 논설주간)씨의 ‘김유정 그 문학과 생애(지문사 刊)’ 30쪽에 “유정과 어린시절 함께 지낸 심상건은 유정의 아명 또는 별명에 대해서 이상과 같이 먹색이라고 설명했다”고 적어 놓았다.

이어지는 아명에 대한 설명은“유정의 본가에서 부르던 멱설이와 유정의 외가에서 부르던 멱색이는 서로 뜻이 통하는 바도 있었다.

멱설이가 재산과 행복을 누리라는 소망이 깃든 아명이었다면, 먹색이는 재산과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 멱고싶은 대로 먹을 수 있다는, 즉 행복을 이미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아명이었다”고 적고 있다.

멱설이와 먹색이로 불렸던 유정의 유년시절은 당시 대부분의 서민들이 초근목피로 궁핍한 생활을 했던 상황에 대비해 보면 행복한 생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행복함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신체적 아픔이 시작돼 평생 고통을 겪는 병치레의 시발이 되기도 했다.

김유정은 일찍이 어린시절부터 배앓이가 심했다고 한다.

하루에도 몇차례 배앓이를 겪어 그 때마다 온 집안이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오랜만에, 귀하게 얻은 아들 이었기에 유정의 배앓이 고통이 집안 어른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아픔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집안의 어른인 할아버지 김참봉은 묘안을 제시했다.

멱설이의 배앓이를 고쳐주기위해 담배 피우기를 가르쳤다고 한다.

담배연기에 뱃속에 있는 벌레들이 죽는다는 속신(俗信)에 따른 것이다.

김유정의 소설속에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무수히 묘사돼 있는 것이 작가인 멱설이 시절부터 담배를 피우던 습성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는게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해석이다.

김유정은 평생 담배를 즐겼다고 한다.

이를 입증하는 사례가 있다.

1937년 ‘조광’지 4월호에서 ‘선생이 만일 날개가 달려 공중에 훨훨 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김유정은 “공중에 올라가 그냥 번듯이 누워 궐련 한개 피워 보겠습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다음호인 5월호 취미문답 코너에서 김유정은 ‘오락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궐련(卷煙) 피는 것”이라고 답했다.

또 문인과의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는 설문에서 ‘무인도에 가서 평생을 살게 된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시렵니까’라는 질문에 김유정은 “궐련과 술 몇 통을 들고 갈까요”라고 답하고 있다.

멱설이 시절부터 골수 에 박힌 담배 피우기 습성이 무인도에 갈 때 꼭 가져가야할 품목으로 지목할 만큼 지독해 졌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멱설이는 집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귀한 몸이었다.

김참봉이 식솔들에게 멱설이가 무슨 짓을 하든 탓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 놓았다고 한다.

그렇게 애지중지 대접받은 멱설이지만 말썽을 부리는 아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장난이 심하지 않고 거짓말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여서 주위사람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어린 김유정, 그 멱설이에게 배앓이에 이은 또 다른 장애가 있었으니 말을 더듬는 습성이었다.

김영기씨의 책 32쪽에 김유정의 어린시절을 조카 영수(永壽)씨가 증언한 내용이 있다.

“말을 하려면 입을 벌리고 한동안 힘을 들이다가 비로소 말을 했다”는 것이다.

배앓이를 하고 말더듬이였으나 투정과 심술을 부리지 않았고, 조용하고 온순해서 30여명이 넘는 집안을 웃음이 가득하게 했던 귀염둥이 멱설이.

김유정의 유년시절은 그렇게 행복했으나, 평생을 두고 겪었던 고질병이 시작된 시기였다.

용호선기자 yonghs@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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