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일보 모바일 구독자 290만

후보자 선거광고

기고

[문화단상]“불교, 해탈시킵시다”

등운 법일 춘천불교사암연합회 사무국장

춘천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는 사찰 암자 90여개소를 순례하던 중 외곽지 고즈넉한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조그만 사찰에 계신 어느 스님께서 내게 빙그레 웃으시며 열반(涅槃·Nirvana)에는 무릇 세 가지 덕이 있다고 하시면서 서두를 꺼내십니다.

첫째는 법신(法身·Dharmakaya)이요, 둘째는 반야(般若·Prajna)이며, 셋째는 해탈(解脫·Vimukti)이라고요. 그리곤 법신이 무엇일까요… 하시면서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보신 화신과 함께 거론되는 불교의 법신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저는 그냥 아이덴티티(Identity), 곧 주체성(主體性)이라 봅니다. 반야가 무엇입니까. 자기 주체성을 확고히 지니고 인간이 지닌 정신 세계의 묶임 없는 삶의 지평을 넓히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지혜일 것입니다. 그러니 반야는 곧 로드맵이겠지요. 해탈은 무엇입니까. 해탈의 표본은 부처님이겠지요. 부처님이 곧 해탈자인 까닭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춰질 때 비로소 열반의 세계가 열립니다.

비공인까지 포함해 한국불교 2,000년의 역사에서 불교의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뼈와 뼛속까지 확 바꿔야 합니다.

위대한 해탈의 선구자 부처님을 스승으로 둔 우리는 아직도 해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해탈을 얘기하면서 정작 마음과 행동은 속박의 굴레를 만들고 있습니다. 굴레란 불교가 지닌 계율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천년만년 억만 겁이 흐르더라도 부처님 금계는 불문율입니다. 원효 스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수행자에게 있어서 금계는 하늘나라에 오르는 사다리며 고통의 바다 위에 놓인 다리입니다. 수행자가 하늘에 오르고 고해를 건너기 위해서는 계율이란 로드맵을 이용해야지요.

불교를 해탈시켜야 합니다. 한국불교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자유를 구속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져 있습니다. 남의 존경을 받으려만 들 뿐 남을 존경할 줄 모릅니다. 스님이란 호칭을 일거에 던져버려야 합니다. 스스로 중(重)이 돼 수행자의 위치가 중함을 알고 거듭(重)해 덕을 쌓는 데 힘써야 하며 스스로 중(中)이 돼 아이덴티티(中)를 바로 지녀 중도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스스로 중(衆)이 돼 인연의 얽힘(衆)을 풀어가되 전체에 속한 나임을 깨달을 것이며 스스로 중(Ing)이 돼 과거에도 미래에도 영원한 현재자(現在者)로서 끊임없이 닦는 자가 돼야 합니다.

수행자는 존경받는 자가 아닙니다. 머리 깎은 게 뭐 대수인가요. 천만에, 깨달음이 대수입니다. 수행자는 존경을 기다리지 않고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입니다.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은 다른 이가 수행자에게 하는 것이지 수행자가 기대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권위의식에서 벗어날 때 한국불교는 대중 속으로 온누리(Global)로 퍼져 갈 것입니다. 나아가 장엄한 생명의 세계에서 신뢰의 뿌리를 뻗고 가르침의 줄기를 뽑아 올리며 법열의 가지와 잎을 피우고 우담바라 꽃을 피워 알찬 열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불교, 해탈시킵시다” 하시면서 끝맺음 하시는데 반짝이는 눈빛이 가슴속으로 스며듦을 느꼈습니다.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