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한 권인규 선생은 유학자로서 살아가던 중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의도하지 않은 항일 투쟁 노선에 나서게 된다.
당시 도내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이 강릉 선교장을 공격, 점거하자 선생은 민보군에 참여해 물리치는 반동학 투쟁에 나섰다. 민보군은 강릉 최대 지주였던 이회원의 주도로 구성됐으며, 선생은 주로 문서 작성 등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는 선생을 의병 투쟁으로 나아가게 했다. 곧바로 민용호 의병에 참여, 격문과 포고문 등을 통해 군사를 모집하는 데 주력했다. 선생의 아들 권종해는 1907년 후기 의병시기에 강릉에서 거의한 후 이강년 의병과 함께 의병 투쟁을 벌였다. 같은 해 3월 인제 백담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결국 중국으로 망명, 의군부에 가입해 유격장으로 활동했다. 3·1운동 당시 도와 충북 일대에서 무력항쟁을 하다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또 선생의 손자인 권기수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 영월 평창 정선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이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후유증으로 1922년 순국했다. 정부는 1980년 권인규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1977년 아들 권종해에게 건국포장을 각각 추서했다.
신형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