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원 금화 출신인 이강훈 선생은 고향에서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이듬해에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일을 돕다가 북간도로 이동해 연길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신민부에 가담했다. 1926년에는 김좌진의 지시로 안도현 삼인방의 백두산 근방에서 둔전제를 위한 신창학교의 교사로 후진을 양성했다.
1929년에는 한족총연합회에 가입, 만주 동북부에서 활동했다. 같은 해 해림에서 북만민립중학기성회를 개최, 이지산 임야운 김유성 등과 함께 민립중학을 설립하고 교포 청년들의 민족정신 고취에 기여했다. 이후 만주에 대한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자 1932년 상해로 망명했고 1930년 유자명 정화암 백정기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에 투신했다. 1933년 3월17일 일제의 주중공사 유길명이 독립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음모를 세운 것을 알고 유길명을 포살하기 위한 활동을 준비했다. 하지만 사전에 계획이 노출돼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 옥고를 치렀다. 1942년 형이 종료됐지만 일제는 선생의 민족의식을 우려, 다시 구금했다. 결국 선생은 광복을 맞아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1969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1977년 독립운동유공자 공적심의위원, 1988년부터 5년간 광복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했다.
신형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