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직장인 신문사에 몸 담은 지 어느덧 27년째다. 그간 꽤 많은 지역에서 근무했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마찬가지이지만 생활 근거지를 옮겨야 하는 인사 이동은 늘, 여러모로 편하지 않다는 걸 경험에서 얻었다. 근무지가 바뀌면 그곳의 오피니언 리더, 지역 유지들을 찾아 인사하고 지방언론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움과 관심을 청하는 과정이 통과 의례다.
언젠가 인사 때 그 지역에서 상당히 명망 있고 영향력이 큰 인물를 만나 차 한잔을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덕담에 가까운 대화 중에 느닷없이 귓전을 괴롭히는 질문이 날아왔다.
“춘천 본사에서 근무하다 이런 시골로 발령 나면 좌천인사 아닌가요?”
귀를 의심하며 다시 한번 질문과 의도를 확인하려 눈을 마주치는 순간 갖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수평과 수직이 있다. 과학이나 공간적인 개념에서 수직과 수평은 좌표를 표현하고 위치를 설정하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자 도구다. 인문 영역에서는 해석이 다소 복잡해질 수 있지만 간단히 보면 평등사회와 계급사회에 대입된다. 인간 평등의 시민사회 개념이 정립되기 전에는 대부분 사회체계가 계급으로 나뉘어 상하가 엄격히 구분됐다.
인간 의식의 흐름은 수직에서 수평으로 발전했다. 앞선 조직들은 구성원이 수평적이다. 세상을 이끄는 초일류 기업들은 최고 경영자부터 초년생 직원까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공유하고 목표를 달성한다. 집단 지성의 힘을 발휘하는 데 수평 시스템이 휠씬 유리하다. 물론 예의와 도덕은 기본이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포장되는 수직적 군림은 별 볼 일 없는 개인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만든다. 위험천만하다. 수직의 설 자리는 좁아지고 있다. 간혹 구시대적 망상 속에 그런 사회 구조를 그리워하거나 흉내내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서울에 올라가고 시골에 내려오는 게 아니다. 올려 보내고 내려 받는 게 아니다. 그건 스스로 만든 착각에 불과하다. 가고 오는 것이고, 보내고 받는 것이다. 수직적 사고가 불러온 중앙집권, 수도권 집중, 지방 공동화 등은 두고두고 우리를 힘겹게 한다.
사대(事大)와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있다. 사대는 사전적으로 '작고 약한 나라가 크고 강한 나라를 섬김'이다. 이는 잘못된 게 아니다. 약소국이지만 강대국을 인정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공생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대주의는 심각한 문제다. 약자가 스스로 강자에 빌붙어 자기 생존을 꾀하려는 의존적 자세로 전락한다. 강대국 틈바구니에 낀 한반도 역사도 사대와 사대주의가 반복적으로 충돌한다. 당파 싸움이 그랬고, 오늘날 선거나 극단적 정쟁이 그 단면이다. 좌천 인사를 거론한 그 지역 유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소중한 삶이 있는데, 잠시 근무하면서 좌천을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