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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오징어 잡던 평범한 청년…고문·옥살이에 가정은 풍비박산

간첩 몰려 40년 고통 받은 안정호(고성)씨

◇납북어부이자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인 안정호씨가 평생을 누명 속에 살아가다 2012년 재심을 신청해 무죄를 받은 재판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고성=권태명기자

납북어부이자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인 안정호(66·고성군 죽왕면)씨의 삶은 비극의 점철이었다. 그의 삶은 납북어부 간첩조작피해의 전형이자 분단 현실이 투영된 사회의 아픔 자체였다.

고성 앞바다서 北 경비정에 나포, 254일 투쟁 끝 귀환했지만

이근안이 조작 매일 고문 시달려…후유증에 치아도 모두 잃어

"못살고 못 배운 사람들 갖고 정치적 이용, 이제라도 반성해야"

■1980년 9월 납북, 비극의 시작=안정호씨는 40여년 전 자신과 가족의 삶이 무너진 그날을 잊지못한다. 속초항을 출항해 오징어잡이를 마친 제2남진호는 1980년 9월6일 밤 귀항을 서둘렀다. 당시 26세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던 안씨는 귀항의 들뜬 마음에 잠시 잠을 청했다. 동틀 무렵인 새벽 4시30분께 선상이 소란스러워졌다. 안씨를 비롯해 19명이 타고 있던 제2남진호는 갑자기 나타난 북한 경비정에 나포돼 북강원도 원산으로 끌려갔다. 안씨는 당시 북한군들이 납북 지점을 북방한계선 남방 6마일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속초항을 코앞에 둔 지금의 고성 대진항 인근이었다. 그들은 우리 해역에서 영문도 모른 채 북에 납치된 것이다.

■254일간의 투쟁과 귀환=원산휴양소에 선원을 가둔 북한군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협박을 일삼았지만 폭력이나 고문은 없었다. 오히려 금강산 관광을 허용하기도 했다. 선원들을 북에 정착시켜 체제 선전의 도구로 삼거나 포섭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원들은 가족이 있는 남한으로의 귀환을 요구했다. 안씨는 “선원 한 명이 유리컵을 씹어 북한군에 뱉기도 했다. 그래도 안 보내주고 자꾸 시간을 끄니까 답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54일 만인 1981년 5월20일 북은 귀환을 허락했다. 선원들은 다시 제2남진호에 올라 속초항으로 돌아왔다. 선원들은 모두 귀환과 동시에 속초경찰서로 연행됐다.

■월북 조작, 숨 막히는 감시=안씨와 선원들은 북한군에게 들은 대로 북방한계선 6마일 지점에서 납북됐다고 진술했지만 수사기관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씨는 “(북한군이)남쪽으로 내려와 우리를 납치했다고 말했고 선원들이 다 들었다. 돌아와 조사를 받으면서 (납북 경위를) 말했더니 ‘해군이나 경찰이 다친다'고 하더라, (우리가) 월북했다고…”라고 말했다.

결국 안씨는 경찰 조사에서 월북을 인정했다. 1년쯤 지나 안씨는 우연히 당시 제2남진호 선장의 부인을 만났다. 부인에게 선장의 안부를 물으니 수산업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고 했다. 끝난 일인 줄 알았지만 안씨에게는 삼엄한 감시자가 붙었다. 안씨는 “안기부에서 북한말 한마디만 하면 처벌한다고 교육받았고 책잡히지 않으려 조용히 살았다”며 “형사가 매일같이 집에 찾아와서 ‘금강산이 좋았냐?'고 묻더라. 술이라도 취해서 만약 좋다고 했으면 고무찬양죄로 잡아가려고 그런 거다”라고 말했다.

■“이근안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3년이 지난 1984년 1월쯤 같이 납북됐던 동료 선원이 안씨에게 ‘맞선이나 보자'고 연락을 했다. 약속 장소는 속초항 2층의 다방. 그러나 약속한 여성은 자리에 없었고 동료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안씨는 30분을 기다리다 1층으로 내려왔지만 도로에 도열한 경찰들이 소총을 들고 안씨를 겨눴다. 안씨는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라고 회상했다. 그리고 한 남성이 다가와 그에게 무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너 이 새끼, 네가 안정호야? 너 이유를 묻지마라.” 그리고 안씨는 바로 연행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남성은 악명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었다.

■매일 같은 고문과 가족의 죽음=안씨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독방에 수감됐다. 두들겨 맞고 전기고문까지 당했다. 그해 1심 재판정에서야 그는 자신이 수감된 이유를 알게 됐다. 국가기밀탐지, 회합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간첩으로 조작돼 있었다. 공소장에 자신도 모르는 증인이 100여명이나 기재돼 있었다. 안씨는 당시 글도 잘 몰랐지만 자택에서는 김일성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모든 것이 조작이었다. 당시 전국에서 14명의 간첩이 체포됐고 안씨가 주동자로 몰렸다. 연행된 지 7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진행된 재판에서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이 선고됐다. 그나마 그해 11월 서울고법의 항소심에서는 재판부가 조작을 눈치챈 듯 국가보안법은 무죄 판결이 내려졌으나 찬양고무죄로 2년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동안 안씨와 그의 가정은 무너졌다. 안씨의 검거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당시 결혼 2년 차 신혼이었던 안씨의 친형은 ‘간첩의 가족'으로 내몰렸고 끝내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어머니 또한 세상을 떠났으며, 수사기관에서는 안씨의 친인척까지 감시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치아까지 모두 잃은 안씨는 출소 후 취직도 할 수 없었다.

■깊게 박힌 어부들의 상처=평생을 누명과 상처 속에 살아야 했던 그는 2012년 재심을 신청해 무죄를 받으며 한을 조금이라도 풀었다. 그러나 아직도 고통받는 속초, 고성의 납북어부들을 생각하면 밤잠을 설친다. 안씨는 “권력을 이용해 제일 못살고 못 배운 사람들, 그런 납북어부들을 갖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불장난 친 거야. 지금 납북어부들 많이 죽었고 (재심으로) 무죄받은 사람도 거의 없다. (국가가) 이제라도 반성해야 한다, 반성”이라고 일갈했다.

특별취재팀=최기영·이현정·권순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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