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관악구 신림동. 버스에서 내려 좁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빨간색 벽돌로 지은 옛 건물들이 보인다. 마치 '비밀의 정원' 입구처럼 지금까지와는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강원학사'. 강원특별자치도가 수도권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의 거주지 지원을 위해 만든 기숙 시설이다.
학사 입구 큰 바위엔 이렇게 적혀 있다.
'고향과 부모님께 부끄러운 자는 이 문을 드나들지 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며 읽게 되는 글귀다.
강원학사 7대 자치회장을 지낸 황동주 (주)이티링크 대표는 "강원도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학사 덕분에 대학을 다녔으니 이게 평생의 빚"이라며 "여건이 안되면 어쩔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황 대표가 말한대로 '빚' 갚은 졸업생들 덕분에 강원학사의 50년은 '빛'이 난다. 서로를 잇는 끈끈한 마음이 굽이굽이 세대를 넘고 넘어 지금도 반짝인다.
그들이 사랑했던 그 곳, 그리고 여전히 남아있는 그 곳. 새강원의숙 시절 7대 자치회장을 지낸 황동주 대표와 현재의 강원학사를 지키고 있는 관악 79대 자치회장 조수현(홍익대 4학년)· 도봉 10대 자치회장 용예훈(국민대 3학년) 학생들을 만나 설립 50주년을 맞이한 강원학사의 시간을 되짚어본다.
■ 황동주 (주)이티링크 대표(새강원의숙 7회 자치회장)
■ 조수현(홍익대 4학년 관악학사 79대 자치회장)
■ 용예훈(국민대 3학년 도봉학사 10대자치회장 )
- 강원학사에 어떻게 들어오게 됐나

△황동주 대표 = "그 때가 1976년이니까 새강원의숙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셨는데 나도 모르게 신청을 하셨더라. 그 시절만 해도 진짜 서울에서 생활하기 힘든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대부분 가난했지. 나 같은 경우도 사실 강원학사 아니었으면 휴학하고 군대가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생활이 아니되니까. 그나마 강원학사 입사가 되어서 대학생활 4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춘천 출신인 황 대표는 당시 연세대 전기공학과를 다녔다. 1976년 학사에 들어와 2년뒤인 1978년 2학기 자치회장(7대)을 지냈다. 벌써 47년전 일이다.

△조수현 회장(관악학사 79대 자치회장) = "저는 2020년 입사했다. 태백이 고향인데 같은 학원 다니던 형들에게 강원학사에 가면 다양한 학교의 친구와 선·후배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관심을 갖게 됐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렸던 시기였는데 같은 고향 출신들끼리 모여 있는 곳이다보니 안정감이 많이 들었다"

△용예훈 회장(도봉학사 10대 자치회장) = "저는 학교 기숙사 떨어지고 지낼 곳을 찾다가 한 줄기 빛처럼 강원학사를 알게 됐다. 좀 늦게 알게 되어서 추가접수로 들어왔는데 지내다 보니까 좋은점도 너무 많았다. 애착을 갖고 하다 보니 사생들을 대표하는 자치회장까지 맡게 됐다"
- 학사에 대한 첫 인상은?
△황 회장 = "사실 정신이 없었다. 하하. 학교가 연세대라 신림사거리까지 한참을 걸어가서 142번 버스를 타고 또 한시간 넘게 가야 했다. 지금이야 전철도 생기고 길이 좋아졌지만 그 때만 해도 오가는게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여기가 아니면 지낼 것이 없었다. 학사에 처음 가서 방에 들어갔는데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선배들도 군기잡지 않고 엄청 잘해줬다. 마음이 편안했다"
△조 회장="첫 날 살짝 길을 잃어 헤맸던 기억이 난다. 겨우 찾았는데 들어오자마자 로비 한가운데에 나무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강원도에 사람 없다는 말만은 듣게 않게 하라' 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엄청난 곳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조 회장이 본 나무 현판 글귀는 고(故) 박종성 강원도지사가 남긴 말이다. 1974년 3월 강원도 최초의 인재양성 방안을 구상한 박종성 지사는 1년 4개월만에 도 출신 서울 유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건립했다. 새강원의숙이 문을 연 1975년 7월 24일, 그렇게 강원학사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 나무 현판이 어떻게 지금의 강원학사에 걸리게 됐는지는 황 회장이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황 회장 ="당시 박종성 지사가 강원 인재를 키워야겠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있었다. 중앙 부처에 가서 현안 부탁을 해야 하는데 눈 씻고 찾아봐도 강원도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라. 그래도 우리 얘기를 진정성있게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부탁할 사람이 없으니 그게 가슴에 한이 맺히셨던 거다. 우리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지사님이 별세하신 후 현판에 써서 새강원의숙 때부터 걸었는데 그게 지금까지 내려왔다"
△용 회장 ="서울에 처음 와서 같은방을 쓰게 된 선배에게 '서울 시내는 역시 사람도 많고 붐비네요'라고 말했는데 선배가 웃으면서 '서울에 시내가 어디있니. 촌티야 그거'라고 하더라. 마침 그 선배가 같은 학교여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학교 기숙사 처럼 침대랑 책상만 있는 줄 알았는데 거실도 있고 해서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 학사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 통금이나 규칙 같은 것들이요.
△황 회장=" 우리 때는 밤10시까지 학사에 들어와야 했다. 정부 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안들어 갈 수가 없었다. 체육대회는 좀 자주했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아니 벌써' (산울림) 같은 노래를 틀어놓고 조깅도 하고, 체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새강원의숙이 있던 신림동 쪽에는 집이 거의 없었고, 기숙사 앞이 깨 밭이었다. 근처 산에 가서 축구하고 야구하고 그랬다. 심심하면 복도를 어슬렁 어슬렁 걸으면서 이방 저방 지나가본다. 그러면 꼭 두런두런 소리가 난다. 거기 들어가서 같이 수다 떨고 몰래 음주도 하고 그랬다"

△조 회장= "지금은 절대 음주하면 안된다"
△황 회장 ="어쩔 수 없긴 한데, 그런게 다 추억 아니겠느냐. 강원학사에서 있으면서 추억만들기 꼭 해야 한다. 40년, 50년 세월이 지나 모이면 그 때의 그 재미있었던 추억 얘기를 아직도 한다"
△조 회장= "저는 '코로나 학번'이다. 그래서 1학년때는 통금이 밤 10시, 2학년 때는 밤9시였다. 모임이 제한적이었던 시기라 모든 생활이 다 강원학사로 집중됐다. 음주는 불허지만, 룸메이트 형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다"
△황 회장 ="몰래 마시는것도 재미있지. 하하"
△조 회장 ="음식 배달해서 같이 먹고, 게임하며 논다. 같은 지역도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 왔던 형들도 많은데 매일같이 이렇게 지내니 엄청 친해졌다"
△용 회장 ="학교 일과 끝나면 저녁 8시, 9시에는 무조건 학사로 온다. 같은방에 사는 4명이서 끈끈해지고, 군데 언제갈까요에서부터 연애고민, 성적고민을 많이 나눴다"
같은 강원학사지만 조 회장과 용 회장은 사는 곳이 다르다. 조 회장은 관악구에 있는 관악학사, 용 회장은 2015년 문을 연 도봉학사에서 산다. 관악학사는 황 회장이 살던 새강원의숙을 1989년 이전·확장한 시설이다. 기존에는 남학생만 100명을 수용했지만 이전과 함께 최초로 여학생 50명을 포함한 243명의 입사생을 선발했다.

새강원의숙의 확장·이전은 당시 김영진 도지사의 잠행 덕분이었다. 재경 기숙사 시설이 너무 열악하다는 말을 들은 김 지사는 도지사 신분을 감추고 비공식적으로 새강원의숙을 방문한 뒤 "건물 자체가 정이 뚝뚝 떨어질 정도의 형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른 시·도 학생들이 부러워하고, 우리 도의 학생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춰야겠다"고 다짐했다. 관악학사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배경이다.
도봉학사는 2016년 제2강원학사로 문을 열었다. 10명이 함께 생활하는 관악과 달리 도봉은 4명이 룸메이트를 이룬다.
- 학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있다면?
△용 회장 ="관악은 부지가 넓어서 운동하고 산책할 곳이 많아서 좋다. 도봉학사는 운동장 없이 탁구 등 실내 종목만 있다. 시설은 도봉이 훨씬 좋긴 하다"
△황 회장 ="그 때는 공간이라고 할 만한 시설이 전혀 없었다. 그냥 뒷산에 아카시아나무 아래에 가서 친구들과 괙괙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고. 학사 내 공간은 아니지만 그곳도 좋았다"
△조 회장="저는 휴게실인거 같다.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이 공간. 남녀 사생들 다 같이 모여서 놀기도 하고 소모임도 한다. 이곳에선 여럿이 어울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황 회장="옛날 학사에는 지하1층에 휴게실이 있었는데 흑백TV 하나 있었다. 그거 보러 저녁에 다들 내려왔었지. 3학년 되니 칼라 TV로 바꿔줬다"
△용 회장="곳곳이 다 추억이긴 한데 저는 옥상정원을 꼽고 싶다. 도봉학사는 단일건물이다 보니 관악처럼 야외 시설은 별로 없다. 다만 6층에 야외 옥상정원이 있는데 제 힐링 공간이다. 통금 시간 이후에 시험공부하다가 갑갑하면 가서 바람도 쐬고, 건물많은 서울이 눈 앞에 펼쳐져 있으니까 또다른 힐링이 되더라. '사랑찾아 인생찾아' 라는 노래도 자주 들었다"
- 강원학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무엇일까
△황 회장="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지나고 나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게 가장 좋았다. 학교 친구들은 취업하면 아무래도 전공이 같기 때문에 비숫한 종류의 일을 한다. 그런데 강원학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학교도, 출신도, 전공도 다 다르다. 사회 나와서도 엄청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다. 생각해봐라. 법관부터 시작해서 의사, 변호사, 공무원, 기업인들, 심지어 실업자도 있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그런 다양성을 접하면서 무엇인가를 또 배우고, 성장할수 있다. 여러분들도 그걸 느꼈으면 좋겠다. 학교 다닐 때 이런 걸 미리 알았으면 더 잘했을텐데. 하하"
△조 회장="공감한다. 이제 4학년이니까 취업 고민이 많은 시기인데 졸업한 형들에게서 현실적인 조언을 엄청 많이 받았다. 학사에 살면서 당연히 금전적으로 혜택을 받는 부분도 있지만 말씀하신대로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 만남이 가장 큰 소득이다"
△용 회장="맞다. 학사 내 문화제에서부터 재경학사 모임까지 있다 보니 다양한 사람과 인사하고 친해진다. 그러다 보니 시야와 안목도 저절로 넓어지는게 느껴진다. 저도 공대생이다 보니 공대친구들이 많았는데 여기에 와서 국어국문, 예술하는 친구들 알게 되면서 나와는 좀 다른 생각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황 회장="서울대 작곡과 다니는 학생이 옆방에 살았다. 내가 클래식 기타를 쳤는데 기타를 가르쳐 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친해졌다. 그런거다. 목적을 갖고 이용하라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다양성은 저절로 갖추게 된다.
개인적으로 고맙게 생각하는건 고교때까지만해도 굉장히 내성적이었다. 나서기 싫어하던 성격이었는데 학사에 와서 선배들 성화에 자치회장까지 맡고 그러다보니 많이 바뀌었다. 그게 사회생활에 굉장히 큰 도움이 됐다"
- 숙우들간 유대감이 매우 끈끈한 것으로 유명하다
△황 회장 ="그 때는 한 층에 샤워실이 1개였다. 남자들만 사니까 거의 발가벗고 복도를 다니는 수준이니 얼마나 친했겠나. 호실별로 여행도 많이 다녔다. 어느 방에 라면이 몇개 있는지도 다 안다. 친형제처럼 지냈다.
강원학사는 밥 먹고 잠자는 그런 단순한 기숙사가 아니다. 옛날에야 워낙 생활이 힘들었으니 그게 최우선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지 않나.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학사에서 추억만들기를 많이 해야 한다.
대학 3학년 때 학사 친구들끼리 술마시다가 '우리 제주도 갈까' 로 시작해 즉흥여행을 했다. 방학때 기차표 할인권을 학사에서 줬는데 그걸로 목포까지 가는 야간열차를 타고 갔다. 이튿날 3등칸 배를 타고 서귀포에 도착해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그 친구들 만나면 그 얘길 하면서 밤새 깔깔 댄다. 나이 60 넘어서도 즐겁다"
△조 회장="스무살 때 코로나19 때문에 학사생들이 다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10명 정원 방에 3명이 있었는데 엄청 친해졌다. 맨날 같이 얘기하고 밥먹고. 아직도 1년에 몇 번씩 꼭 본다. 선배님들 얘기 들어보면 시작이 학사였을 뿐 계속 인연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 같다. 숙우라는 인연이 엄청 단단하지 않나"
△용 회장="학교 가 있을 때 빼고는 거의 같이 생활하니 당연히 끈끈해진다. 고민 얘기하고 서로 위로도 해주고, 좋은 기회가 있으면 소개도 해주고. 졸업한 선배들과도 연락을 자주 연락을 하는데 가끔 선배 초청 특강도 한다. 그 분들을 보면서 '멋진 위치까지 가셨구나' 하며 롤모델로 삼는 일도 많다"
- 강원학사 생활을 하면 아무래도 강원도에 대한 생각도 남다를거 같다
△황 회장="여기서 혜택을 받았으니 받은건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어찌 보면 여기서 대학을 다닌게 평생 인생의 빚이다. 경조사만 빚이 아니다. 강원학사는 도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지 않나. 빚진거다. 그것도 평생 빚이다. 기회가 되면 갚아야 된다. (여건이) 안되는 사람도 있지만, 되는 사람은 갚자 이거지. 여기 없었으면 대학 못다녔을거 아닌가"
△조 회장="그때와 분위기는 좀 다르지만 마음의 빚이 안 생길수 없다. 말씀대로 많은 것을 받은 거니까. 이런 마음이 후배들에게도 계속 전해졌으면 한다"
△용 회장="강원도라는 말이 참 신기하다. 친근하고, 저절로 유대감이 생긴다. 선배들처럼 나중에 큰 사람이 된다면 당연히 후배들을 위해 물심양면 도울거 같다"

- 올해가 강원학사 설립 50주년이다. 또 50년뒤, 100주년을 맞이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말이 있다면
△황 회장="강원학사를 하나의 키워드로 표현한다면 '강원도의 미래' 아닐까. 하하. 당부하고 싶은 것은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라는 거다.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인성이 되어야 한다. 강원학사는 그런걸 배우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책도 많이 읽고 선후배 간 토론도 하고. 그러다 보면 인재들이 쌓일것이고 또 그러다 보면 강원도를 위해 '요만큼'이라도 기여할 것 아니냐. 이제 졸업생이 7,000명 된다. 마음이 모여야 한다.
강원도 인구가 줄어들고 있지만 내가 강원도 가서 살 순 없다. 내 가족과 직업, 직장이 여기니까. 그렇지만 속초에 휴양소를 지었다. 가족들도 가고, 직원들도 간다. 가서 기름도 넣고 낚시도 하고 밥도 먹는다. 그럼 누군가가 돈을 벌 것 아닌가. 그렇게라도 하는거다"
△조 회장="사람을 남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저 역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다. 모든 외향적 능력을 발휘해서 많은 인맥을 쌓았으면 좋겠다"
△용 회장 ="좀 더 단순하게 지금의 생활을 즐겼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즐기고 쉴 수 있는 곳으로 마음 속에 강원학사가 남았으면 한다"
△황 회장="세대 차이가 있지만 변하지 않는 건 같이 생활한 선후배, 친구들간의 끈끈한 우정,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