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와 광주 등에서 맹활약 중인 강원 출신 기획자들의 성공 이면에는 그들의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탄탄한 인프라와 행정의 신뢰가 자리잡고 있었다. 반면 강원도내 시·군 문화 현장은 담당 공무원의 교체로 인해 축적된 경험이나 프로세스가 매번 리셋되는 구조적 한계에 갇혀 있다.
◇ “실패해도 괜찮아”… 상상력 자극하는 압도적 인프라
대구는 ‘오페라 도시’라는 명확한 비전 아래 전국 유일의 오페라 제작 극장인 ‘대구오페라하우스’를 운영 중이다. 이곳에서는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전편과 같은 난해한 대작도 과감히 무대에 올린다. 단기적 수익보다는 장기적 브랜딩을 중시하는 정책적 지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광주 역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라는 거대 플랫폼을 통해 예술과 기술이 결합한 실험적인 공연을 쏟아내고 있다. ‘범 내려온다’의 주역들이 만든 미디어 판소리극 같은 혁신적 콘텐츠는 ACC의 첨단 시설과 제작 지원 시스템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반면 강원도의 현실은 척박하다. 기획자의 아이디어를 담아낼 전문적인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무대, 조명, 음향 등 기술 스태프조차 구하기 어려워 서울에서 인력을 데려와야 하는 상황에서, 기획자들은 창의적인 실험보다는 행사 운영 자체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 ‘갑·을 관계’ 아닌 ‘파트너’… 전권 위임하는 신뢰의 힘
성공하는 문화 도시에는 행정이 기획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기획자를 단순한 ‘대행사 직원’이 아닌 비전을 공유하는 ‘파트너’로 대우한다. 홍천 출신 황운기 감독이 광주 ‘충장축제’의 총감독으로 위촉된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광주 동구청은 축제가 끝나자마자 차기 연도 주제를 확정하고 총감독을 위촉해 기획의 밀도를 높였다. 세부 간섭 대신 총감독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파격적인 신뢰는 기획자가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대다수 문화 현장에서는 여전히 수직적인 관료주의가 작동한다. 기획자들은 지역 실정과 맞지 않는 중앙정부 가이드라인을 수행하는 대리인으로 전락하기 일쑤다. 행정의 지시를 이행하는 수동적인 구조 속에서 기획자의 주인의식과 창의성은 축소될 수 밖에 없다.
◇ ‘단타’에 갇힌 강원…미래를 기획할 수 없다
기획자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단기 성과주의’다. 대부분의 문화 사업이 1년 단위 공모사업으로 진행되다 보니, 장기적인 호흡의 기획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매년 새로운 기획안을 내고, 연말이면 “관객이 몇 명 왔느냐”는 정량적 성과 평가에 대응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실패의 위험이 있는 실험적인 시도는 배제되고, 평가에 유리한 ‘안전하고 뻔한 행사’만 반복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나마 전국적인 인기몰이를 하던 원주 ‘다이내믹 댄싱카니발’이 예산 삭감과 함께 축소되고, 평창 동계올림픽 레거시 프로그램인 ‘강원트리엔날레’ 까지 폐지되는 강원도의 ‘문화판’에서 문화기획자들의 이탈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떠나간 ‘문화광부’들을 다시 불러모으고 싶다면, 그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시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