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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카지노를 말한다](2)광산공화국에서 카지노공화국으로

교육·의료 환경 등 주민복지 개선 과제

◇내국인 카지노 설립의 근거가 됐던 3·3투쟁 당시의 모습.

석유수입 붐 일자 사북 94% 폐광 … 주민 대체 산업 요구

3·3투쟁 시작 강원랜드 설립 ‘단초’ 방문객 불야성 이뤄

지역 고용 60% 가계소득 연 1,700억 사회공헌 연 160억

“광산공화국으로 불릴 만큼 국내 최대 민영탄좌 등이 집중됐던 강원남부 폐광지역은 어느덧 카지노공화국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폐광지역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한 지역민의 표현이다.

불과 10∼20년사이에 지역에서 벌어진 역사를 단적으로 함축한 대목이다.

그 시공간적 변화 만큼이나 그 변화에 따른 영향과 후폭풍은 실로 놀라웠다.

당초 지역의 정체성을 규정하던 탄광공화국의 기원은 일제강점기시대로 올라간다.

1930년대로후반부터 강원남부지역의 탄광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1960년대 산업화와 박정희정권을 거치며 급속도로 집중되던 석탄산업 육성은 1974년과 79년 제1,2차 오일쇼크(석유파동)를 겪으며 가속도를 달렸다.를

당시 석탄은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라, 구국자원(救國資源)의 역할이었고, 탄광근로자들은 곧 나라를 구하는 구국용사로 추켜세웠다.

국내에서 생산 가능한 유일한 자원이 석탄이었고, 한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바로 그들의 어깨에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연간 10만톤 미만의 소규모 탄광이 무려 320개가 난립했다는 것은 이를 잘 증명해준다.

동원탄좌가 있던 정선 사북읍의 인구만 현재 군 9개읍·면의 전체 인구보다 많은 5만5,000명까지 육박했다.‘탄광공화국’이었다.

“정선의 고한 사북은 우리의 희망이었지. 농촌에서 죽어라 일을 해도 배를 곯는 날이 많았는데, 탄광근로자가 되고는 집 주지, 연탄주지, 월급 두둑히 주지.우리의 희망이었지. 당시에는 탄광지가 선사하는 꿀단지가 금세 사라질줄은 몰랐지.”

30년 가까이 탄광근로자로 근무한 윤석환(73·정선군고한읍)씨의 말이다.

1980년대 사북항쟁뒤 동원탄좌와 같은 대규모 민영탄광 취직은 대학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려웠다고 한다.

당시 동원탄좌 다닌다면 앞뒤보지 않고 딸자식 시집보냈을 정도라는 것이 그들의 증언이다.

탄광지역 개들도 1,000원권 지폐는 싱거워서 물지 않고 1만원권만 물고 다녔다는 우스갯소리는 그래서 나왔다.

석탄산업의 부흥기였다.

하지만 1998년 정부는 석탄산업 합리화라는 명분아래,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석탄 채광보다는 외국에서 석유를 들여오는 것이 더 싸다고 판단한 정부는 서둘러 탄광 문을 닫으라고 종용했다.

정부의 정책적 판단에 따라 나라를 ‘구한다’던 자원은 한순간 나라 경쟁력을 ‘좀 먹는’ 골칫덩어리로 전락했던 셈이다.

그 변화는 실로 무서웠다.

1995년 당시 사북읍 인구는 9,970명선으로 10년사이 두배 이상 썰물처럼 빠져나갔다는 것이 단적인 예다.

주민들은 동요했다.

1994년 메이저 민영탄좌인 동원탄좌마저 갑을병 3교대 방식에서 병반이 폐지된다는 움직임이 일자, 위기감이 현실로 다가왔다.

1989년부터 1995년까지 태백시의 경우 39개탄광중 92%인 34개가 폐광되고, 고한읍과 사북읍의 경우 36개탄광중 94%인 34개가 문을 닫았다.

주민들은 ‘핵 폐기장도 받아들이겠다’며 폐광에 따른 대체산업을 요구했다.

역사적인 3·3투쟁이 발발했다.

1995년 본격적인 대정부 투쟁에 들어갔다.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주민들은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연일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1980년 사북항쟁을 경험한 정부로서는 소요사태를 걱정했다.

급기야 당시 산업자원부차관이 현장에 내려와 3·3합의문세 사인했다.

합의된 5개항은 균형개발및 지방중소기업육성에 관한 법률에 의한 개촉지구 지정, 폐광지역개발촉진특벌볍 제정, 탄광지역진흥정책집중투자, 향후 5년간 동탄 삼탄 170만톤 생산, 주요 탄광지역에 대체산업 창업을 위한 5%의 투자비 장기저리로 240억 융자지원.

특히 폐광지역 개발촉진법을 제정을 통해 대한민국 형법에 명시된 국민에게 적용되는 ‘도박죄’를 묻지 않고, 합법적으로 카지노라는 도박을 할수 있는 내국인 출입 카지노 강원랜드의 설립의 단초가 됐다.

결국 우여곡절끝에 2000년 10월 스몰 카지노가 고한읍 박심지구에 문을 열었다.

하지만 지역 주민 누구도 오늘의 성공을 예측하지 못했다.

‘과연 잘 될수 있을까’

예상외의 대박이었다.

2001년 한햇동안 4,620억원의 매출을 올린데다 무려 순이익만 매출대비 40%대인 2,183억원을 기록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황금어장’이란 애칭이 붙어다녔다.

카지노는 연일 넘쳐나는 고객들로 불야성을 이뤘고, 폐광 지역민의 눈을 휘둥그레졌다.

2003년에는 사북읍 백운산 인근에 본카지노가 정식으로 문을 열고 2005년 골프장, 2006년 스키장이 개장하면서 종합휴양지를 꿈꾸고 있다.

도박의 대명사 강원랜드의 이미지는 희석되고 휴양지의 하이원리조트가 새 CI(기업이미지)로 나왔다.

지난해 방문객은 341만명에, 매출 1조원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지난 6월말 기준으로 강원랜드 직원은 3,186명, 용역사 1,054명으로 모두 4,240명에 달한다.

이중 정선 등 폐광지 4개시군의 고용율은 47%, 도내 60%에 달한다.

용역사는 98%가 폐광지역 주민이다.

결과적으로 강원랜드 설립으로 인한 폐광지역 고용효과는 전체의 60%에 달한다.

이로인해 강원랜드측은 지역주민 고용으로 인한 가계소득 창출이 연간 약 1,7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2002년 설립뒤 국가및 지방재정 기여도는 1조8,415억원이다.

종합리조트 등 개발사업비로 현재까지 2조484억원이 투자됐으며, 아웃소싱을 통한 지역연관산업 육성에 연간 600억원, 콤프사용 등 상거래 유발효과는 연간 400억원, 복지재단의 지역복지및 사회공헌 연간 160억원에 이른다.

폐광지역 노인, 사회복지인, 청소년, 외국인주부 등 소위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업을 펼치면서 나름의 효과를 보고 있다.

탄광공화국으로 불리며 석탄채광에서 흘러나왔던 돈이, 카지노 설립을 통해 또다시 회전되는 셈이다.

사북읍과 고한읍에 있던 민영 최대탄좌였던 동원과 삼척탄좌는, 강원랜드로 바뀌며 부흥을 겨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대체산업으로의 연착륙이다.

10년만에 탄광 부흥시절 흥행하던 선술집은 고급술집으로, 여관 여인숙은 모텔과 호텔로 이름이 바뀌며 옛부흥시절을 구가하고 있다.

강원랜드가 위치한 외지인들로 북적거리며 카지노로 인한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셈이다.

반면 정주 인구 규모는 그 지역의 경제부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강원랜드가 위치한 정선군 사북읍의 경우를 보면 지역경제 동력으로서의 탄광과 카지노와의 확연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1985년 동원탄좌가 한해 287만톤의 석탄을 생산할때에는 사북읍 인구가 2만3,100명에 달하는 등 인구와 석탄 생산량과 상관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탄광을 대체한 카지노산업은 지역 정주 인구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그 유효성이 약한 측면이 발생한다.

매년 카지노 설립으로 상당한 부가 발생함에도, 강원랜드가 위치한 사북읍 인구는 여전히 매년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복 고한사북남면지역살리기공동추진위원장은 “카지노 설립 10년간 고용효과와 유동인구 증가 등 긍정적 측면은 있지만, 인구 증가는 교육과 주거 의료환경 등이 총체적으로 조합되는데 강원랜드로서는 그 부분에 대한 이해와 준비가 미흡했었다”며 “카지노의 독점적 권한이 주어진 기간 종합휴양지로서의 준비도 중요하지만, 교육 주거 의료환경 개선 등으로 대변되는 지역의 인구 증가도 중요한 의제가 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것이 바로 강원랜드의 설립취지인 폐광지역의 경제 회생과도 맥을 같이한다”고 했다.

정선=류재일기자 cool@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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