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라! 지칠 줄 모르는 도박자들아. 시간이 룰렛의 판에서 항상 승리한다.”
19세기의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일찍이 카지노의 본질을 꿰뚫었다.
순간 순간은 승리할지 모르지만, 카지노의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 도박에 손댄 이들은 모두 패배자가 되리란 사실을 극명하게 일깨우는 격언이다.
하지만 도박은 중세에서부터 현대에까지 그 많은 폐해 속에서도 인간의 역사와 맥을 같이했다.
왜일까.
그 질문에 사회학자들은 호모 알레아토르(Homo Aleator)를 그 해답으로 꺼내놓는다.
도박적 인간.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 등 인간의 속성을 규명하는 또다른 명제 중 하나다.
‘대박’ 미련 못버리고 찜질방 등 전전
최저생계비 생활 … 중독 치료대책 시급
전당포 100여곳 성업 불법 사채 심각
■찜질방 24시
내국인 카지노인 강원랜드 주변 사북읍의 한 찜질방.입구부터 ‘○월○일부로 선불이 아니면, 이용을 금합니다’라는 글자가 눈앞에 들어왔다.
세상 천지에 어디 목욕탕이나 찜질방이 돈을 내지 않고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해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100여개에 달하는 탈의실 옷장과 벽 사이의 좁은 틈 사이에는 여행용 가방과 박스, 손가방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다른 곳과 똑같은 개인 사물함 규모로는 개인 물품을 보관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장기 투숙자들이다.
수면실에는 일반 찜질방에서 만날 수 있는 간이침대가 아닌 사람 하나 누우면 딱 들어맞을 크기의 목재로 짠 2층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수십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게 설계돼 있었다.
찜질방 관리자는 “하루 이용금액이 9,000원이다 보니, 4만원대의 일반 여관이나 10만∼20만원이 넘는 카지노호텔의 비용보다 크게 싸다.이곳의 80∼100명가량이 장기 투숙자다.이 동네에만 이런 곳이 3∼4개가 더 있다”고 했다.
이들이 애초부터 여기를 찾았던 건 아니다.카지노에서 돈을 탕진한 뒤에도 카지노촌을 떠나지 못하고 최저의 생계비로 ‘대박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의 단면이다.이들을 카지노 노숙자나 카지노 앵벌이라고 부른다.노숙자라는 사전적 의미에 맞춘다면 이들의 규모를 600∼700명선으로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카지노에 빠져 지역에서 장기투숙하는 부류로 의미를 넓게 가져가면 2,000∼3,000명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그들의 속어대로 남자는 ‘앵벌이’라고 부르지만, 여자는 ‘쪽박걸’로 불린다.
■국민연금으로 카지노
찜질방에서 만난 박만석(61·가명)씨는 이곳 사람들에게 ‘창립 멤버’로 통한다.카지노 이용객에게 사용금액에 따라 일정 금액을 적립해 주는 콤프의 일련번호가 1만번 이하 라는 것이 그 이유다.2000년 스몰카지노 개장때부터 줄곧 카지노를 출입했고 초창기 시절 콤프카드를 부여받았으니, 나름의 예우(?)를 받고 있는 것.
그는 얼마전 포천의 집에 다녀왔다고 했다.몇 해전 이혼한 부인과 시집간 딸에게 도장을 찍어주기 위해서다.주한미군 이전으로 편입되는 본인 명의의 용지 보상비를 가족에게 넘겼다.“카지노 출입 전부터 경마도 들락거렸고, 한평생 고생만 시켰으니 비록 이혼했지만 가족에게 미안해서… 나도 염치가 있지.” 하지만 당장 그의 생계가 걱정됐다.하지만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지난해부터 30만원가량 되는 국민연금을 타.그리고 한달에 자리 추첨에서 앞번호 나오면 자릿세 좀 받고.뭐 그러면 배 곯지 않고 근근이 생활은 유지되지.오히려 지금이 편해.이제는 더 이상 잃을게 없거든.”
■자릿세, 투핸드 스리핸드 베팅
밤 12시가 조금 넘자, 수십명의 찜질방 투숙객들의 휴대전화에 일제히 메시지 도착음이 울려왔다.“우와! 355번.에이 1,200번.788번.”저마다 복권당첨 번호를 맞춰 보듯 수초 사이로 긴 탄식이 쏟아졌다.
정부 규제로 카지노 객장의 시설은 한정된데 반해 출입하려는 고객은 많다보니 강원랜드는 오전10시 개장 순서를 ARS 추첨을 통해 선정한다.때문에 자리를 선점한 카지노 노숙자들은 나중에 들어온 고객들에게 소위 자릿세를 받고 자리를 되파는 것.
한 카지노 노숙자는 “요즘에는 언론에 불법 자릿세 얘기가 많이 나오다 보니, 보안요원들이 틈틈이 자리를 확인하는 통에 오후 3∼4시쯤까지 버텨야 한다”며 “그날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20만원 정도는 받는다”고 했다.또 다른 수입원은 투핸드, 스리핸드 베팅.테이블게임의 경우 1회 베팅액이 30만원으로 제한되다보니, 더 많은 베팅을 위해 사전에 카지노 노숙자와 짜고 일정 칩을 나눠준다.자신이 베팅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하다 보면, 베팅액은 2, 3배가 된다.투핸드(두 팔) 스리핸드(세 팔)란 말은 그래서 나온다.
■독특한 요금제의 카지노촌 모텔
카지노촌의 모텔 등은 타 지역의 숙박업소와는 다른 독특한 규정을 적용한다.숙박업소는 전날밤이나 당일 새벽에 체크인하면, 낮12시까지 체크아웃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카지노촌의 숙박업소도 그런 시스템을 적용하기는 하지만, 오전 6시 안팎에 들어오는 고객들을 위해 당일 오후 4시까지 이용을 허락한다.카지노 폐장이 오전 6시, 개장은 4시간뒤인 오전 10시에 이뤄지면서 고안된 카지노촌만의 숙박시스템이다.사북과 고한읍은 오전9시쯤 되면 부산하게 마을 곳곳의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총총걸음을 만날수 있다.오전 10시 개장시간을 맞추느라 강원랜드가 운영하는 버스를 타기 위한 카지노 고객들이다.
또 카지노가 오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20시간가량 올나이트로 운영되다보니, 고한·사북지역에는 유독 24시간 식당과 편의점 슈퍼가 많다.
■카지노 여인숙
카지노촌에서 기거하는 이들에게 그나마 찜질방은 나은 편이다.사북읍내의 허름한 한 3층 건물을 찾았다.사람 하나 간신히 통과할수 있는 좁다란 계단을 걸어 올라간 공간에서는 오래된 건물로 인해 곰팡이 냄새가 풀풀 피어났다.60∼70년대 시멘트로 대충 구조를 짜고 베니어합판으로 덧대어 문을 만든 공동화장실에 간이욕실, 그 옆으로 2∼3평남짓한 방이 다닥다닥 붙었다.15∼20만원가량 되는 월세에 2∼4명이 함께 지내는 곳이다.
한 카지노 노숙자는 “이런 여인숙을 찾는건 남자들도 있지만, 사실상 사실혼 관계의 남녀가 많다.찜질방은 남자전용, 여자전용이지만 여기는 그렇지 않다.카지노에서 가족과 헤어진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만난 부류들이다.하지만 이따금씩 남자가 카지노에 올라간 사이, 옆방에 투숙하는 남자와 눈이 맞아 결국 폭력사건으로 비화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그만큼 이곳의 성 문란은 만연돼 있는 상태”라고 했다.
또 다른 카지노 노숙자는 “수만원대에 성매매가 이뤄지는 것도 이곳의 특성이다.하지만 타 지역은 업소 등에 의해 운영되는 상황과 달리 이곳은 개인과 개인의 거래속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3일에 이자 10%의 사채시장
사북과 고한지역의 인구는 1만여명 수준.이 작은 동네에 정식 허가를 받아 운영중인 전당포 수만 100개 안팎에 이른다.현행 대부업법은 이자율을 한 달에 4%, 연 48%를 넘지 못하게 하고 있다.하지만 허가를 받은 전당포라도 불법 이자율이 만연해 있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한때 사채업에 뛰어들었었다는 박태식(가명)씨는 “허가받은 곳이라도 대다수가 불법사채업이라고 보면 된다.또 사무실을 차리지 않고 카지노에서 개인별로 다니며 사채놀이를 하는 ‘삐끼’들도 수십명에 이른다”고 했다.
담보는 차량이나, 신용카드.이곳에서는 차량의 경우 중고차 시세표를 기준으로 매매가보다 50∼60%선에서 돈을 빌려준다.무조건 선이자 10%를 떼고, 3∼10일에 10%의 이자율을 적용하고 있다.연중 300, 600%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고한과 사북시내는 저당 잡힌 차량들로 넘쳐난다.국도 38호선에서 사북읍으로 들어오다 보면 널찍한 공터에 주차장이 강 건너에는 2층 규모의 거대한 공용주차장이 보인다.대다수가 전당포에 잡힌 차량들이다.부산 울산 경기 전남 서울 강원 등 전국의 차량 번호에 800cc 경차에서부터 트럭 화물에 4,000cc 고급차까지 다양하다.사채업에 몸담았던 그는 “최근 정부에서 강원랜드 매출을 1조원으로 묶는다며 도박중독을 줄이겠다고 했는데, 참 책상머리에 앉아서 정책 펴는 사람들 얘기”라고 쏘아붙였다.
그는 “이 지역 사채업자만 100∼150명이라고 가정해보자.한 달 평균 수천만∼수억원씩 돈을 돌리는데 1년이면 그 액수가 어마어마하다.카지노 1조원 매출의 상당수가 바로 여기의 불법 사채업자들의 돈이 돌고 돌아 강원랜드 수입이 되는 것이다.돈 떨어지면 다시 집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불러세워 손쉽게 다시 도박자금을 빌려주는 꼴이다.그럼 생각해보자.자본주의 국가에서 주식회사의 연간 총매출을 정해놓고 더이상 손님을 받지 말라는 것과 불법 사채업자들을 제대로 단속하는 것 중 과연 어느 것이 도박중독의 폐해를 줄이는데 효과적이겠는가.”라고 말했다.정선=류재일기자 cool@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