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n번방·박사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도 1년이 지났다. 이 사건은 2018년과 2019년 미성년자를 포함한 일반 여성들을 상대로 한 성착취 영상이 해외 모바일 메신저인 텔레그램을 통해 대대적으로 공유·판매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말한다. 은밀하게 음지에서 이뤄지던 이 디지털 성범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다름 아닌 평범한 대학생들이었다. 대학 선후배 사이인 이들은 2019년 7월 n번방의 실체를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한 뒤 잠입 취재를 했고 이 내용들이 '추적단 불꽃'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됐다. 이후 관련자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이른바 'n번방 방지법'도 만들어졌다.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검거(2020년 3월16일)된 지 꼭 1년이 흐른 지금, 이들을 다시 만났다. 이들은 아직도 신변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다. 사진도 그래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촬영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책 출간 후 북토크·강연 활발
정부에 피해자 지원 대책 제안
끈질긴 추적의 동력은
피의자 가해행위에 분노했다
최근엔 인식 변화에 힘 얻어
디지털 성범죄 반복 이유는
사실상 플랫폼이 범행장소 제공
성 착취 책임서는 손떼고 있어
가장 뜻깊게 생각한 변화는
'디지털 성착취' 개념 정립돼
피해자 의심의 눈초리도 줄어
■지난해 9월 강원일보와 인터뷰를 한 후 처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지난해 연말까지 마음 편하게 쉰 날이 없었다. 책 출간 이후 북토크를 진행했고, 디지털 성범죄 현실을 알리는 강연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지원하는 정부의 대책도 부족하다고 생각해 한 기관에 들어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 지원을 위한 대책과 관련 정책을 정부기관에 제안하기도 했다. 지금도 새롭게 추적 중인 여러 유형의 디지털 성범죄가 있지만 지금은 말씀 드리기가 조심스럽다.”
■디지털 성범죄를 추적한 지 1년8개월이 지났다. 당시 끈질긴 추적의 동력은 무엇이었는가=“처음의 동력은 '분노'였다. 피의자들의 가해행위를 보면서 이들을 어떻게든 처벌받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분노가 지속될수록 몸과 정신이 힘들어졌다. 최근에는 '변화'도 하나의 원동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느리지만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이 변화를 믿고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해 나가자는 마음이다.”
■가장 뜻깊게 생각하는 변화는=“우리 사회에 '디지털 성착취'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이 가장 뜻깊다. 또 사회 구조적으로 디지털 성착취를 이해하려는 분이 많아져 법률적인 부분도 많이 개선됐다. 이전에는 불법촬영 같은 디지털 성범죄를 오프라인 성범죄보다 가볍게 여겼지만 'n번방 사건'이 알려지면서 성범죄 피해자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들도 조금은 줄어든 것 같다. 사실 성범죄 피해자를 대하는 사회 분위기는 앞으로도 더 많이 바뀌어야 한다.”
■'n번방 사건'이 이슈가 된 뒤로 디지털 성범죄가 줄고 있다고 보나=“국가에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으니 표면적으로는 줄어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들이 텔레그램 비밀방을 만들고 다크웹으로 이동하는 등 더욱 음지로 숨어들었다. 그들을 선제적으로 잡기 위한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디지털 성착취 산업 시장을 막을 길이 없다.”
■해결 방법이 있을까=“디지털 성범죄를 뿌리 뽑기 위해선 사회 구조 전체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 개인과 언론을 비롯해 학계와 경찰, 검찰, 국회, 법원이 모두 음란물이 아닌 성착취물이라고 칭하고 나서야 디지털 성범죄가 심각한 범죄로 인식됐다. 또한 경찰의 잠입 수사, 스토킹 방지법, 국제공조 등 피해자를 위한 발 빠른 대처 또한 중요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사후 조치에 급급한데 디지털 성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 조치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한 시기다.”
■비슷한 사건인 '켈리 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 섰었다. 켈리가 1심에서 4년 선고를 받았는데 어떤 심정인지=“법정에 출석하고 '아직 n번방에 대한 관심을 놓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렬했다. 주요 가해자들의 재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켈리도 원래 징역 1년을 받고 지난해 9월에 출소할 예정이었지 않나. 가해자들이 제대로 된 판결을 받을 때까지 증언을 이어 가려면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을 것 같다. 증언을 위해 켈리가 그동안 저지른 일들을 다시 한번 훑으며 그의 범행에 다시 한번 경악했다. 검찰이 구형한 10년도 결코 높은 형량이 아니다.”
■디지털 성범죄가 플랫폼을 바꿔 가며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플랫폼이 성착취 문제 책임에서 손을 떼고 있기 때문이다. 합법적으로 만들었을지라도 플랫폼 사용자들이 합법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상 플랫폼이 범행 장소를 제공한 것이므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텔레그램, 디스코드,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각 플랫폼들은 사용자의 관심을 끌 만한 방법은 고안하지만 사용자의 안전에 대한 부분에는 관심이 없다. 기업의 공적인 책임을 다하길 바란다.”
■지난해 발간한 책에서 익명으로 활동하면서 느끼는 아쉬움을 적었다=“우리는 신변의 위협으로 얼굴을 가리고 활동해야 했다. 연대하는 분들과 함께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지만 어느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언젠가 우리의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을 하게 된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려면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과 사회적 인식이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 n번방 성착취 영상물을 구매해 기소된 피고인들은 잇따라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는데 구매와 소비는 성착취물 제작·유포의 실질적인 동력이기 때문에 이 역시도 중범죄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제대로 된 피해자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큰 용기를 내지 않아도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현재 피해자가 지원을 받으려면 본인의 피해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증언해야만 받을 수 있는 지원들이 많다. 그 자체가 2차 가해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피해자들께서 용기를 내주고 있긴 하지만 성착취 범죄를 목격했던 우리가 그랬듯 트라우마와 함께 일상을 살아가고 계신 분이 많은 만큼 이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또한 현재 1심에 120만원으로 측정돼 있는 무료 법률 구조기금이 연말이 되면 바닥날 것으로 예상된다. 범죄가 언제 일어날 지 모르니 시간과 상관없이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기금이 고갈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
■지난 1년여간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앞으로 바라는 바가 있다면=“분명 변화의 바람은 불었다. 하지만 우리가 봤을 땐 변화가 너무 느리다. 특히 재판부가 그렇다. n번방 영상을 구매하고 공유한 사람들이 여전히 집행유예 판결을 받는다. 지금은 무덤덤하지만 이들이 텔레그램에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남길 때 잔인한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가해자에게 기회를 주는 세상이 아닌 피해자 입장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바라보는 2021년이 됐으면 좋겠다.”
인터뷰·정리=권순찬기자 sckwon@kw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