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일보 모바일 구독자 280만
문화일반

고조선 마지막 도읍지 '왕검성' 서한의 침략 막아냈더라면 우리 땅으로 남았을 '요동'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 순간 20가지

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Those who fail to learn from history are doomed to repeat it.'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다. 유태인들은 구약을 통해 다윗과 솔로몬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나라를 재건할 수 있었다. 한국인 역시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日帝)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미·중 신냉전 와중 세계 도처에서 민족주의가 고조되고 있다. 일본, 중국에 의한 우리 영토와 역사 문화에 대한 공격 빈도가 급증하고 있다. 4,000년 우리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20장면을 20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이 글은 이웃나라들의 우리 영토와 역사 문화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방어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처음에는 다소 어려울 수 있으나 연재가 진행될수록 흥미를 느낄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비평을 기대한다.

(1) 기원전 107년 왕검성 함락

# 서한에 눈엣가시였던 조선

2128년 전인 기원전 107년 서한(전한) 무제(武帝)가 보낸 10만 대군이 고조선(조선) 수도 왕검성 성문 안으로 물밀듯이 진입했다. 우리 민족 최초 국가 조선의 마지막이었다. 요동반도산 옥으로 만든 귀고리가 출토된 고성(高城) 바닷가를 지나 북쪽으로 계속 가면 두만강에 이른다. 두만강의 '두만'은 만호장(萬戶長)을 뜻하는 고대 터키어에 기원한 만주어 '투먼'의 음차(音借)다. 고대 터키인들은 고조선 말기부터 삼국시대 초기 기간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흉노제국(匈奴帝國)을 세웠다. 제국 최전성기를 연 묵돌의 아버지가 '두만'이다. 흉노는 외몽골 오르콘강 유역을 수도로 동으로는 만주, 서로는 톈산산맥, 남으로는 치롄산맥, 북으로는 바이칼호까지를 영토로 하는 아시아 최강국이었다. 기원전 200년 가을 서한 1대 황제 유방이 직접 흉노 공격에 나섰다. 유방이 이끄는 32만 서한군은 산시성 일대에서 흉노군을 잇달아 격파했다. 묵돌의 유인책이었다. 날씨가 추워지고 진눈깨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묵돌은 4~5만 기(騎)를 동원해 따퉁 외곽 백등산에서 서한군을 포위했다. 서한군은 기아와 동상으로 죽어 나갔다. 유방은 묵돌에게 항복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기원전 195년 흉노정책을 놓고 유방과 갈등하던 연왕(燕王) 노관이 흉노로 망명했다. 노관의 부장으로 랴오시(遼西) 일대를 수비하던 '상투 튼' 위만(衛滿)은 요새(遼塞)를 나가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조선에 투항했다. 흉노의 왼쪽 날개 조선은 서한에게 두통거리였다.

# 흉노에 조공하던 서한의 반격

유방 이후 서한 황제들은 흉노에 조공해야 했다. 경제(景帝) 시대를 지나면서 서한과 흉노 간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한족 농민의 생산력이 흉노 유목민의 조직력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경제의 아들 무제는 흉노정책과 관련, '쉬운 문제부터 우선 해결한다'는 선이후난(先易後難) 전략을 채택했다. 서한은 기원전 139년 흉노의 배후 오손(Asvin)과 동맹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을 뒷받침할 재정은 소금과 철의 전매를 통해 염출했다. 무제는 기원전 129~119년간 곽거병, 위청 등으로 하여금 흉노를 계속 공격게 했다. 처음에는 뛰어난 기동력을 갖춘 흉노군이 서한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격퇴했다. 시간이 갈수록 서한군이 흉노군의 전투기술에 적응했다. 기원전 121년 곽거병이 이끈 서한 1만 기병이 하서회랑으로 쳐들어가 흉노군 3만여명을 죽이고, 하서회랑 통치자인 휴저왕(休屠王)의 왕비(閼智)와 14세 왕자 포함 2,5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수도 장안으로 끌려가 마구간지기로 전락한 흉노 왕자는 무제 암살 음모를 저지한 공을 세워 마감(馬監)에 임명됐다. 그는 '김일제(金日 )'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서한은 하서회랑에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흉노 전쟁에서 서한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전마(戰馬) 상실이 격심했다. 300일 기준 군사 1명당 약 360㎏의 식량과 600㎏에 달하는 소나 말의 여물을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흉노 정벌전이 100일을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 남월 평정한 서한의 조선 공략

기원전 3세기 말 진·한(秦漢) 교체기에 다수의 연(燕)·조(趙)·제(齊) 유민(遺民)들이 조선으로 도망했다. 위만은 이들을 조직해 조선 왕조를 찬탈했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이전부터 조선은 흉노와의 교류 등을 통해 확보한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서한과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간 중계무역 이익을 독점했다. 서한은 조선의 행위에 분노했다. 서한은 조선에 앞서 군사력이 약한 남월을 먼저 점령코자 했다. 남월 수도는 광저우 근교 번우에 있었다. 서한은 기원전 111년 전매 품목이던 철강 밀수 등을 핑계 삼아 노박덕 휘하 육군과 양복이 지휘하는 해군으로 해금 남월을 침공케 했다. 서한은 쉽게 남월을 평정하고, 남월 땅에 9군을 설치했다. 서한은 곧바로 조선 원정을 준비했다. 서한은 기원전 109년 가을 외교분쟁을 이유로 육해군을 동원해 조선을 침공했다. 누선장군 양복은 해군 5만명을 거느리고 산둥에서 발진해 메이산 열도를 따라 항진, 보하이만(渤海灣)을 건너 조선 수도 왕검성으로 진격했다. 좌장군 순체는 지금의 베이징 지역 병사 5만명을 거느리고 육지로 진군했다. 양복은 육군의 진격이 지체되자 정예 병사 7,000명을 선발해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하다가 조선군에게 대패했다. 순체의 육군도 서한과 조선 간 국경을 이루던 패수 등에서 조선군에게 격퇴 당했다. 흉노군이 서한군의 배후를 노릴 상황이 됐다. 무제는 조선과 강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순체와 양복은 조선의 이간계에 넘어가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무제는 제남태수 공손수를 특사로 파견했다. 공손수는 순체와 결탁, 무제의 허락도 없이 양복을 체포했다. 순체가 육해군 10만명을 통할해 조선을 계속 공격했다. 전쟁이 2년여나 지속되자 조선 지배층에 내분이 일어나 화친파들이 서한으로 망명했다. 기원전 108년 여름 화친파 참(參)이 우거왕을 암살했다. 흉노가 지원하고, 성기(成己)가 끝까지 항전했으나, 조선은 기원전 107년 서한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때 조선이 서한의 공격을 막아내고 나라를 보전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조선은 고대국가로 발전했을 것이다. 요동은 우리 땅으로 남았을 것이다.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나오는 전후 처리 결과를 살펴보면 서한의 조선 원정은 실패한 전쟁이었다. 순체는 기시형(棄市刑)에 처해졌으며, 공손수 등은 참형을 당했다. 조선 투항파들은 제후로 임명됐다. 낙랑과 현도 등 한군현(漢郡縣)은 조선 토착사회 통제가 주목적이었으나 토착사회의 반발에 부딪혀 낙랑군을 제외하고는 곧 축출됐다.

# 왕검성·패수 위치 논란

△왕검성 소재지와 △조선-서한-흉노 간 국경을 이뤘다는 패수의 위치 등에 대해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왕검성 전투 시 살아 있었던 사마천의 '사기'와 함께 5세기경 인물인 북위(北魏) 역도원의 '수경주(水經註)'를 포함한 사료들을 살펴봐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사기'는 서한군이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조선을 공격했다 한다. '수경주'는 고구려 사신의 말을 인용, 왕검성이 대동강 북쪽 고구려 평양성 일대에 있었다 한다. 왕검성이 오늘날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사기'에 묘사된 해륙(海陸) 서한군 진군 과정과 전쟁 상황 기술에 비춰볼 때 맞지 않다. 패수가 대동강이나 청천강이라는 일제(日帝) 시대부터의 주장 역시 맞지 않다. 흉노군을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서 보병과 보급부대 포함 서한 육군 5만명이 베이징 부근에서부터 진군해 조선군이나 흉노군의 공격 한번 받지 않고 베이징에서 무려 1,500㎞나 떨어진 평안도 지역까지 진군했다는 주장은 억지로 보인다. 보병 1일 행군거리가 약 20㎞라는 점에서 여하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경우에라도 1,500㎞를 행군하기 위해서는 2~3개월이 소요된다. 허베이성 중북부는 '유주(幽州)', 즉 '먼 땅'으로 불릴 정도로 변두리 중의 변두리였다. 서한 변두리로부터 평안도까지 1,500㎞,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먼 거리다. 큰 하천들인 롼허, 다링허, 랴오허, 압록강도 건너야 한다. 서한 10만 대군이 필요로 하는 군수품은 천문학적 규모였을 것이다. △위만의 망명 상황(동쪽으로 패수를 건너다)이나 △왕검성 공략 시 서한 해군의 항해 방향(위로 나아가다) 포함 전쟁 상황 묘사, △지리 분석 결과 등에 비춰볼 때 패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롼허, 다링허 또는 랴오허로 추측된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대동강이나 청천강은 패수가 될 수 없다. 랴오허의 지류였던 훈허 이동에는 흉노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 대동강 유역에서 낙랑 유물은 발견되나, 조선 역대 왕들의 능이나 궁궐터, 성터 등 유물, 유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낙랑군 중심지를 왕검성 옛터에 뒀을 것이라는 주장은 가설에 불과하다. 연, 조, 제나라 관련 유물이 랴오허 유역에서 발견됐다. 랴오양에서는 비파형 동검과 함께 '상투 튼' 조선인의 얼굴이 양각된 거푸집이 발견됐다. 공손씨 연나라의 도읍도 랴오허 유역 양평에 있었다. 랴오허 유역이 대동강 유역보다 더 선진적이고 인구도 많았다는 뜻이다. 가장 발달된 곳에 수도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월 수도 번우도 베트남 내지(內地)가 아닌 광저우 인근에 있었다. △유물·유적 △사서 기록 △지리 △위만의 망명 상황 △당시 정치·군사 상황 등을 종합 검토해 보면 왕검성은 랴오허-다링허 유역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패수나 평양(平壤)은 고유명사가 아니며, 낙랑과 대방은 여러 차례 이동했다.

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안동고와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독일연방행정원 법학석사와 우즈베키스탄 세계경제외교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1993년 외무고시에 합격(27회)한 뒤 주 제네바 1등 서기관, 주 중국 참사관 겸 총영사, 주 다롄 출장소장, 주 프랑크푸르트 총영사 등을 역임하고 현재 강원도 국제관계대사로 파견 근무 중이다. 동양사에 관심이 많아 2007년 '백범흠의 동양사 오딧세이 중국은 있다', 2010년 '중국'에 이어 지난해 '지식인을 위한 한·중·일 4000년' 등을 펴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