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을 처음 방문한 해는 1980년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대관령에서 사북 가는 길은 멀었다. 중학교 3학년인 외사촌 누나와 함께 갔는데 사북엔 외갓집 누나가 살고 있었다. 농사를 짓던 매형이 동원탄좌에 취직해 사북으로 이사를 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길은 멀어도 소문으로만 듣던 탄광촌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찾아간 사북은 과연 한눈에 보아도 탄광촌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택들, 공중화장실, 탄 더미, 검은 산, 검은 물, 검은 길…… 방 하나에 부엌 하나인 사택의 한쪽 벽은 합판이었는데 옆집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기차가 사북을 지나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사북, 고한을 다시 찾아간 건 카지노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석탄 합리화 정책으로 폐광이 된 산 중턱에 카지노가 들어섰고 시내 곳곳에 전당포와 모텔들이 난립해 있었다. 동원탄좌의 수직갱 타워, 사북역, 안경다리, 지장천, 시장 골목, 파출소, 화절령, 초등학교가 있던 자리, 도롱이 연못, 등등의 장소를 천천히 기웃거렸는데 1980년의 풍경은 사북에서 거의 지워지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지장산 속에 무수히 뚫려 있는 갱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문은 굳게 닫혀버린 지 오래였다. 광부들도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역 뒤편 검은 저탄장에서 자라는 흰 자작나무들은 마치 저 1980년 4월과 5월 사북항쟁의 광부들이 밝혀놓은 촛불인 것만 같아 오래 바라보았다. 그 아래로 기차가 사북을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세월이 흘러 사북항쟁에 대한 다큐 ‘1980 사북’과 보고서 ‘항쟁의 긴 그림자-가려진 국가폭력’을 힘겹게 보고 읽었다. 합동수사단에 무차별 연행된 광부와 광부 아내들이 털어놓은 고문에 대한 증언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다. 한마디로 끔찍했다. 자다가 속옷 차림으로 끌려간 광부. 고문에 쓰인 각목, 포승줄, 고무호스, 곡괭이, 주전자, 고춧가루…… 물고문, 통닭구이, 각목 밟기, 볼펜 고문, 구타, 욕설, 성희롱, 철창 타기…… 참고인으로 끌려갔다가 고문 수사만 받고 기소되지 않은 채 귀가한 인원만 140명이란다. 거기에다 간첩 누명까지 덮어씌우려 했다가 실패하자 돌멩이를 던진 죄목으로 계엄포고령 위반, 소요, 특수 공무 방해 치상죄를 선고받은 광부. 고문당했다는 소리를 주위에 말하면 다시 잡아들이겠다는 겁박. 고문받은 여성 피해자들의 오랜 침묵과 증언 회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할 때까지 계속되는 고문. 이후 그 죄책감과 원망, 배신감으로 사북을 떠나간 사람들. 그해 5월 사북을 지나가는 기차는 떠나가는 이들의 기차였다.
710항(巷) 선산부, 820항 광부, 760항 후산부, 1050항 광부, 650항 선산부, 710항 후산부, 760항 선산부, 고토일항 후산부, 동원탄좌 하청 1030항 광부(숫자는 갱의 해발 표고다)…… 그들은 정선경찰서의 임시조사실에서 군복으로 갈아입은 채 고문을 당했다. 자발적으로 항쟁에 참여한 5천여 명의 사람 중에서 주모자와 배후자를 찾아내겠다는 합동수사단에 의해. 그리고 평생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명을 달리한 이도 여럿이다. 돌아온 한 광부는 이렇게 구술했다. ‘참 고생했는데 밥 한 그릇 먹자. 소주 한잔하자.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따뜻한 말 한마디가 더 귀한 거지.’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건네지 않았다. 사북을 지나가는 기차는 그렇게 멈춰서고 말았다.
1980년 여름 그러니까 나의 외갓집 누나의 남편은 광부들이 떠난 자리에 들어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대관령으로 돌아와 한동안 광산촌 사북 방문기를 과장해서 떠벌리고 다니느라 바빴다. 돌이켜보니 그게 정말 미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