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는 유럽 동부권 나라들 중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로 손꼽힌다.
체코의 근세사는 합스부르크 나치 소련에 이어 지금은 관광객에 의해 점령되고 있다.
중세 보헤미아 왕국의 문화유산을 고이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근세 공산주의체제를 벗고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기며 빠른 속도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가장 발전적인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체코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보헤미안의 땅’ ‘프라하의 봄’이 아닐까 싶다.
15년 만에 다시 찾은 프라하는 이제 사회주의 어두운 모습을 씻고 서유럽 어느 나라에 못지않은 안정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방랑하는 집시로 소설이나 영화에서 그려진 ‘보헤미안’은 왠지 낭만적으로 들린다.
19세기 프랑스 앙리 미르제의 소설을 각색한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헴 (La Boheme)은 파리 뒷골목의 가난한 예술가 보헤미안들의 방랑과 애환을 그린 것이다.
보헤미안이 체코사람들이라는 원래의 뜻과는 달리 이처럼 방랑자의 의미로 불리게 된 것은 옛날 체코지방에 집시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북인도 지방이 고향으로 믿어지는 집시들은 발칸반도를 거쳐 14세기경 유럽에도 나타났는데 프랑스 사람들은 특히 체코(보헤미아)에 살던 집시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세월이 지나면서 보헤미안은 사회관습에 속박받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 작가 지식인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오늘날 체코 공화국은 수도 프라하를 포함한 서쪽 지방을 보헤미아(Bohemia), 동쪽지방을 모라비아(Moravia)라고 부르는데 보헤미아는 이 지방에 선주하던 보이(Boii)족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보헤미아’는 ‘체코’의 라틴어 표기이다.
보헤미아는 넓은 의미로 체코와 동의어이지만 좁은 의미로는 독일 국경과 접한 체코 땅의 서쪽 분지, 기름진 농토와 광물자원이 풍부한 농경산간지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헤미아 땅의 중심에 수도 프라하가 있다.
유럽의 심장부에 위치한 체코는 국토의 대부분을 독일 폴란드 오스트리아와 접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이들 강대국의 침략에 휘말렸다.
독일(신성로마제국, 나치)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에 합종연횡하였으며 최근세에는 소련의 영향 아래 있었다.
체코의 민족기원을 보면 서유럽민족의 주류인 겔트족과 동유럽 민족의 주류인 슬라브족의 혼혈이다.
독일 쪽에 가까운 서부 보헤미아 지방에는 고대부터 겔트 족 계열의 보이족이 살았다.
5∼7세기에는 동으로부터 슬라브족이 유입하였으며 9세기에 이들은 오늘날 체코와 슬로바키아 땅에 모라비아 왕국을 세웠다.
세계 최대 규모의 성으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프라하 성은 이 시기 프르제미슬 왕조가 세운 것이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체코는 950년 신성로마제국(독일)의 속국이 된다.
카를 4세(재위 1346∼1378년) 때는 신성로마제국의 번성기로 번영을 구가하였으며 프라하 시내를 흐르는 블타바(Vltava)강에 건설된 최초의 다리 카를(Karluv)교는 이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체코가 자랑하는 560m의 이 유명한 다리는 늘 인파로 붐빈다.
다리의 교각에는 30개의 조각상들이 있는데 특히 중간쯤에 있는 가톨릭 신부 얀 네포무츠키의 청동상 앞은 늘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는 1393년 바츨라프 4세에게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밝히기를 거부한 죄로 혀가 잘리고 돌에 묶여 다리 위에서 블타바 강으로 내던져졌다.
후세들은 그를 성인으로 추모하고 프라하 성안의 비투스 성당 안에 3톤의 은관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였다.
16세기 초 오스만 터키가 북상하면서 위협이 되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국에 합병된 체코는 1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가 패망하면서 독립하였으나 1939년 다시 나치의 침략을 받는다.
나치에 저항하지 않은 것은 오늘날 프라하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잘 지켜준 결과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팽창주의 권내에 든 체코는 ‘프라하의 봄’으로 상징되었던 1960년대 공산당 저항운동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1968년 두브체크가 주도한 자유민주화 운동은 소련의 잔혹한 탄압으로 좌절되었고 끝내 프라하엔 봄이 오지 않았다.
나는 프라하를 찾을 때마다 교향곡 ‘신세계(From the new world)’를 작곡한 드보르작(Dvorak)의 흔적을 찾아본다.
프라하 교외 넬라호제베스에서 출생한 그는 프라하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면서 스승 스메타나(Smetana)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항거하는 민족운동 음악가로 애국적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1893년 그가 미국 뉴욕 내셔널 음악원 원장으로 초빙되어 신대륙으로 건너가 장엄한 미 대륙에 감동되어 조국 보헤미아를 그리워하면서 쓴 교향곡 9번 ‘신세계’는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연주로 카네기 홀에서 초연되었다.
필자가 청년시절 꿈과 이상을 키우면서 도취되었던 서사시적 명곡이기도 하다.
프라하시내 남쪽 블타바 강변 비셰흐라드 요새 안에 있는 슬라빈 공동묘지로 그의 무덤을 찾았을 때는 서울에서 찾아온 어린 음악도들이 화환을 놓고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출신의 모차르트는 열광하는 프라하 시민들을 자주 찾았는데 그의 작품 오페라 ‘돈 조반니(Don Giovanni)’는 1787년에 이곳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공연하였던 이 오페라 극장 에스타테스는 220년이 지난 지금도 모차르트 오페라 전용 극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독일 국경이 가까운 서부 보헤미아지방으로 가면 카로비 발리(Karlovy Vary)라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온천마을이 있는데 이곳은 역사적 인물들이 많이 다녀 간곳으로 유명하다.
러시아의 피터대제, 합스부르크 가의 프란츠 조셉, 문호 톨스토이는 물론 베토벤 와그너 쇼팽 브람스 같은 유럽 음악의 거장들이 이곳에서 휴양하면서 작품 활동을 한것을 보면 체코가 예사로운 나라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체코인들의 수준 높은 정서적 품격에 이런 예술적 배경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최영하 본사 독자권익위원장 ·전 우즈벡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