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강원인물, 그들이 꿈꾼 삶]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연구소장이 말하는 우성 박용만
독립투쟁노선 차이로 이승만과 대립, 수많은 고오 세우고도 역사에서 외면
1881년 철원읍 중리서 출생
안창호·이승만과 더불어
미주 독립운동 이끈 3대 민족지도자
日·美서 대학 다닌 국제적 엘리트
언론·군사·정치학 전문지식 갖춰
무장투쟁만이 최선이라 판단
재학 중 해외서 독립군 양성 매진
한인 최초 국외군사학교 열어
임시정부 탄생에도 중추적 역할
신채호·신숙과 '군사통일회의' 결성
이승만과 옥중서 만나 형제의 연
그들의 운명적 관계도 시작
외교노선과 무장투쟁노선 갈등
이승만 탄핵에 나서며 대립 극에 달해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하기 직전
“내 일생에서 가장 큰 정적은 우성”
이해명이 쏜 흉탄에 피살당해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
뒤늦게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어
출생지도 표석 하나 없이 잡초 무성
더 늦기 전에 신원 회복 위해 나설 때
그 첫걸음은 철원군민과 도민의 몫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은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론자다. 그는 1921년 4월 신채호, 신숙, 이회영 등과 중국과 연해주의 독립무장단체들을 연합해 '군사통일회의'를 조직하고,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까지 계획했었다. 그가 무장독립투쟁론을 주창한 이유는 당시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일본 제국주의 잔학성을 실질적으로 격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편 무장투쟁론자로만 알려져 있는 박용만은 일본 게이오의숙과 미국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한 국제적 엘리트였다. 그는 정치사상은 물론 국어(국문), 언론, 군사,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적 지식을 갖춘 선각자였다.
박용만은 준비론 안창호(安昌浩), 외교론 이승만(李承晩)과 더불어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3대 민족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사책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그를 거의 알지 못한다. 이에는 그만한 배경적 이유가 있다.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이승만과 정치적으로 치열하게 경쟁했고, 임시정부노선 문제로 민족의 지도자 김구(金九)와도 대립했던 인물이었기에 박용만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다. 이승만이 4·19의거로 권좌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하기 직전 “나의 일생에서 가장 큰 정적은 우성(又醒)이었다”고 비서에게 고백했다 한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박용만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 작업이 진척됨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나 퍽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881년 7월 2일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鐵原邑) 중리(中里)에서 출생한 박용만은 일찍이 미국 유학을 다녀온 개화파 인사인 숙부 박희병(朴羲秉)의 주선으로 1895년 일본 게이오 의숙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박영효 등 개화파들과 교류하며 활빈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로 인해 1901년 3월 귀국 시 체포돼 한성감옥에 1차 수감된다. 1904년 주한 일본공사의 황무지개척권 요구 반대운동에 참여했다가 한성감옥에 2차 투옥되고 옥중에서 이승만과 만나 형제의 연을 맺게 되며 그들의 운명적 관계도 시작됐다.
1905년 출옥한 박용만은 미국 망명길에 오르고 숙부 박희병과 함께 콜로라도주 덴버(Denver)로 가게 된다. 이 때 이승만이 옥중에서 저술한 '독립정신' 원고를 미국으로 반출했고 이승만의 외아들 봉수를 미국 동부까지 데려갔다. 그가 해외 망명길을 택한 것은 한일의정서와 러일전쟁으로 이미 한반도가 준 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상황이었고 미국에 밝은 숙부 박희병의 영향이 컸다. 박용만은 1908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해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며 ROTC 과정을 이수한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전국 각지에서 의병전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국제정세 흐름에 밝았던 박용만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투쟁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 해외에서 독립군 양성에 매진한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09년 네브래스카 주 커니에 있는 한인농장 내에 한인 최초의 국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를 열게 된다.
한인소년병학교는 학기 중엔 각자 학교에서 공부하다 여름방학 때 입소해 평균 8주간 군사훈련을 받았고, 오전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오후에 군사훈련을 받는 둔전병제(屯田兵制)로 운영됐다. 둔전병제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해야하는 독립군에게는 가장 시의적절한 체제였다. 한인소년병학교는 일본 측의 항의로 1914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으나, 당시 세계를 주도하던 미국 땅에 주권을 빼앗긴 약소국가 최초로 세워진 독립군 양성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는 단순히 전투병만 배출하는 군사학교가 아니라 서방 선진교육을 통해 국제정세에 밝고 신지식을 갖춘 구국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한인소년병학교는 이후 각국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기관에 영향을 줄 정도로 항일무장투쟁을 선도했다. 후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소년병학교의 교육편제가 차용되었고, 박용만이 저술한 '군인수지'와 '국민개병설'이 교재로 사용되었다. 그의 무장독립투쟁 집념은 1914년 하와이로 옮겨 '대조선국민군단' 창설로 이어져 왕성한 활동을 펼치게 되나, 1915년 여름 일본의 항의와 파인애플 농장 재정악화로 폐쇄된다.
독립투쟁노선 차이로 인한 박용만과 이승만의 대립도 국민군단 와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박용만과 이승만의 숙명적인 관계에 관한 일화는 많다. 미국 유학시절 이승만은 박용만이 1908년 여름 덴버에서 소집한 애국동지대표회 및 1912년 한인소년병학교 제1회 졸업식 등에 불원천리(不遠千里) 참석하여 축하하고 격려해주었다. 박용만은 1913년 이승만을 5,000명 한인동포가 사는 하와이로 초청한다. 그러나 독립투쟁 방안에 있어 근본적인 노선 차이로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외교독립노선의 이승만은 무장투쟁노선을 고집했던 박용만의 막대한 경비가 드는 대조선국민군단 계획에 찬성할 수 없었다. 1918년 1월 이승만이 법정에서 박용만을 “한국인 군단을 설립하고 일본군함 이즈모호가 입항하면 파괴할 음모를 가진 자”라고 증언하면서 두 사람은 정적(政敵) 관계로 변모한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 수반인 이승만을 탄핵하는데 박용만이 나서면서 갈등과 대립은 극에 달한다.
무장투쟁론을 강하게 주창했던 박용만은 뛰어난 사상가이자 언론인이기도 했다. 1911년 신한민보를 통해 주장한 '무형국가론'은 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의 기반이 되었다. 이 조직은 북미와 하와이, 멕시코, 러시아, 중국 각지에 지부를 둔 실질적인 최초의 임시정부였다. 그는 임시정부를 “원래 국가의 성립은 백성과 토지로 기초를 삼고 법률과 정치로 집을 만드는 것이나 시방 우리는 백성은 있고 토지는 없어 불가불 남의 토지 위에 집을 지을 수밖에 없는 고로 무형의 국가”라고 지칭하였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기 8년 전 이미 망명정부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것이다. 1917년 박용만이 기초한 '대동단결의 선언'과 1919년 '대한독립선언'은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19년 9월 박용만은 대한민국 통합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추대되지만 응하지 않는다. 실질적인 항일투쟁이 그에겐 더 중요했던 것이다. 1921년 4월 박용만은 북경에서 이승만 임시정부 노선에 반대하는 신채호, 신숙, 이회영 등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결성하고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이 드러나자 이승만 성토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군사통일회의에선 상해임정과 임시의정원 불승인안을 통보한다. 이후 박용만은 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연안 국제신문기자대회(7월1~15일)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1927년 4월에는 호놀룰루 팔라마지방에 우성학교를 설립하고 직접 국어교과서를 편찬하여 교포들 국어교육에도 이바지했다.
박용만은 1928년 10월 17일 중국 북경에서 이해명이 쏜 흉탄에 쓰러지고 만다. 그가 피살당한 이유로는 국내 밀입국설과 조선총독 밀회설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독립운동계에 일파만파로 퍼진 조선총독 밀회설로 박용만은 독립운동사에 수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그동안 역사에서 외면 시 되었다. 일제가 당시 박용만에 대해 작성한 300건이 넘는 기밀문서 어디를 뒤져봐도 그가 스파이라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정보문서에는 오히려 박용만을 '배일선인(排日鮮人)의 영수', '불령선인'으로 표현하는 등 요주의 인물로 여겼고, 밀정(密偵)들이 끊임없이 감시했다. 한편 해당문서에는 박용만과 독립운동 세력 간의 이간책도 언급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 할 수 있는 1921년 6월 27일 러시아 붉은 군대에 의해 조선독립군 1,000여명이 참혹하게 괴멸되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목도(目睹)한 박용만이 러시아 공산주의의 남하 즉 적화(赤化)를 막기 위하여 한·중·일 3국의 협력을 모색하고 일시적으로 일본세력을 이용하고자 조선총독을 만나려는 거대하고도 담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박용만은 러시아와 일본의 국제적 대립관계를 이용해 독립군의 무장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일본을 몰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이런 계획을 일제는 역으로 독립운동계를 분열시키는 이간책으로 활용하였고 결국 그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그의 죽음은 격동기 시대적 상황에 따른 비극적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비명에 간 그의 안타까운 죽음이 발생한지 70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미주 한인들이 독립운동 3대 민족지도자로 꼽는 박용만의 출생지에는 현재 표석 하나 없이 잡초만이 무성하다.
철원 출신 독립운동가 박용만 관련 자료를 정리하면서 그동안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왜곡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역사학자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오늘날 박용만 관련 연구는 가일층 진일보했다. 평생 조국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박용만은 우리나라 최고의 항일무장투쟁론자였다. 그동안 우리는 그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살아왔다. 더 늦기 전에 그의 완전한 신원(伸寃) 회복을 위하여 모두가 나서야 한다. 그 첫걸음은 철원군민과 강원도민의 몫이다.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프로필
■1963년 철원 출생
■성균관대 사학과 졸업, 강원대 대학원 사학과 수료
■2007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2009년 철원향토사연구회 조직
■2010년 철원역사문화연구소 설립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접경지역 5개 군 향토사 대중화사업에 참여
■2012년 사회적기업 (사)철원공감 창립
■저서는 '철원의 변천사', '스토리텔링, 철원', '철원 쇠둘레 평화누리길', '소울로드' 등이 있고, '철원지역 고인돌 사회 복원연구'와 '궁예가 철원으로 간 까닭', '수복지구인 철원지역 주민 21명의 삶과 애환', '철원지역 민통선 북방 마을 사람들' 등 논문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