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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독립 위해 목숨 바친 그의 생가터…변변한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역사속 강원인물]소설가 김도연씨와 떠나는 우성 박용만의 고향 철원

⑴ 우성(又醒) 박용만 선생의 생가인 철원군 철원읍 중리 224번지에는 현재 농막이 들어서 있다. ⑵ 우성 박용만 선생의 생가인 철원군 철원읍 중리 224번지에서 김영규 (사)철원공감 대표(오른쪽)가 김도연 소설가에게 일제강점기 사진을 펼쳐보이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철원=권태명기자

소설가 김도연씨와 떠나는 우성 박용만의 고향 철원

탐방 대상 박용만을 생각하면 막막할 뿐이었다

13살 때 철원을 떠나 돌아오지 못했고

남아 있는 것 또한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 살아온 날들은 실로 강렬했으나

끝내 독립을 보지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였다

그것도 동포에게 저격당해 눈을 감았으니…

노동당사 조금 못 미처 관전리(官田里) 건너편

박용만이 태어난 곳 중리 224번지에는

몇 개의 컨테이너박스와 마당과 주변의 밭

그리고 그곳에서 자라는 농작물들이 전부였다

논에서는 콤바인으로 한창 벼 수확 중이었고

한 아주머니가 도토리를 마당에 널고 있었다

그의 집안도 결국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단 말인가.

가족들도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는가

일본 제국주의 시절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가족의 곤궁했던 삶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세 사람은 쉽게 그곳을 떠나자는 말을 못 했다

다시 철원을 찾았다. 지난번엔 소설가 이태준이었는데 이번엔 독립운동가인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을 찾아서였다. 춘천에서 만난 권태명 기자의 차에 실려 지난번과 똑같은 길을 이용해 철원으로 들어갔다. 멀고 낯설기만 했던 철원 땅이 조금 친숙해진 느낌이었다. 길, 논과 밭, 물, 산, 그리고 사람들이. 곳곳에서 길을 막고 훈련 중인 군인들까지도. 하지만 정작 탐방 대상인 박용만을 생각하면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철원읍 중리에서 태어난 박용만은 13살 때 떠나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남아 있는 것 또한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우성 박용만 역시 그 살아온 날들은 실로 강렬했으나 끝내 대한독립의 날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명을 달리한 비운의 독립운동가였다. 그것도 중국 땅에서 같은 동포에게 권총으로 저격당해 눈을 감았으니…….

철원을 가로지르는 강은 한탄강이다. 한탄강(恨歎江)이 아니라 한탄강(漢灘江), 큰 여울이다. 그런데 철원을 휩쓸고 간 역사는 한탄(恨歎)에 더 가까웠다. 태봉국의 왕이었던 궁예의 울음과 임꺽정의 전설이 서린 고석정 역시 그러했다. 가장 가까이에는 남북의 분단과 전쟁이 자리하고 있다. 옛날 강원도 최고의 곡창지대인 철원평야를 끼고 번성했던 철원읍 시가지는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다. 지금의 철원은 사라진 철원읍 대신 갈말과 동송, 그리고 김화가 휴전선을 등에 지고 한탄강 아래와 위에서 벼가 익어가는 철원평야를 품에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북쪽의 금학산과 남쪽의 명성산을 바라보며. 하지만 그 여파로 인해 외지인의 입장에서 철원을 찾아갈 때면 당혹스러운 경우가 많다. 대체 어디가 철원이란 말인가. 갈말은 어디고 동송은 어디며 구철원은 어디고 신철원은 또 어딘가. 까딱 잘못하면 뜻과 똑같이 철원(鐵原), 쇠둘레를 한 바퀴 돌아서야 목적지를 찾기 십상이다. 어쩌겠는가. 그게 철의 삼각지대(철원 평강 김화)를 휩쓴 불행한 역사의 후유증인 걸.

갈말읍에서 만난 사단법인 '철원공감'의 대표 김영규씨의 안내로 길을 떠났다. 우리가 갈 곳은 단 한 곳, 우성 박용만이 태어난 철원읍 중리 224번지였다. 박용만은 13살 때 집을 떠나 아버지의 동생 박희병 슬하에서 자랐다. 숙부는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온 개화파 인사였는데 아마 근대교육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여튼 박용만이 13살 때까지 살았던 곳으로 가는데 왠지 길이 익숙해 다시 살펴보니 역시 지난번 이태준을 만나러 가던 그 길이었다. 남과 북이 합작으로 놓았다는 승일교(承日橋) 아래의 한탄대교를 건너니 철의 삼각지 전적기념관, 장흥리의 철원평야, 동송읍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북으로 향하는데 나타난 도피안사(到彼岸寺) 안내판, 지뢰지대임을 알리는 삼각형 팻말, 전차방어벽, 제2땅굴 안내판… 이름들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도착했다. 노동당사 조금 못 미처 관전리(官田里) 건너편 우성 박용만이 태어난 곳에. 그 일대는 전쟁 전까지는 번화한 철원읍내 시가지였다고 김영규씨가 가지고 온 옛 사진은 말해주고 있었다.

중리 224번지에는 몇 개의 컨테이너박스와 마당, 그리고 주변의 밭에서 자라는 농작물들이 전부였다. 밭에서는 콩과 마가 자라고 있었고 그 옆 논에서는 콤바인으로 한창 벼 수확을 하는 중이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한 아주머니가 도토리를 볕 좋은 마당에 널고 있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아느냐고 김영규씨가 물으니 망설이지 않고 우성 박용만이 태어난 곳이라고 대답을 했다. 땅을 사고 나서 남편이 일러줬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유명한 분이 태어난 곳이어서 자기도 아들 하나 낳으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딸이 태어났다며 멋쩍게 웃었다. 나는 변변한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는 박용만의 생가 터 일대를 게으르게 서성거렸다. 가을볕은 따가웠다. 그의 집안도 결국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단 말인가. 가족들도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는가. 일본 제국주의 시절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곤궁했던 삶이 다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볼 게 없었지만 우리 세 사람은 쉽게 그곳을 떠나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벼를 수확하는 콤바인만 멍하니 바라보며 서성거렸다. 볕은 뜨거웠지만 한없이 쓸쓸한 철원읍 중리 224번지의 현실이었다. 결국 우리가 선택한 다음 장소는 생가 터 뒤편의 작은 동산에 자리한 누군가의 무덤이었다. 팥이 심어진 밭 사이로 뚫린 좁은 길을 걸어 동산으로 향했다. 마치 거기 올라가면 옛 철원읍이, 철원 사람들이 보이기나 하는 것처럼.

“당신은 권총으로 박용만을 죽였는가?”

“그렇소.”

“총을 몇 번 쏘아서 박을 죽였는가?”

“두 번 쏘니 죽었소.”

1928년 10월 17일 베이징에서 박용만은 이해명이란 이에게 권총으로 저격당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위의 대화는 1928년 11월 7일 재판기록의 도입부다. 박용만은 그렇게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3살에 철원을 떠났던 박용만은 24살에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곳에서 '한인 소년병학교', '대조선 국민군단'을 만든다. 그는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론만 고수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뛰어난 언론인이자 사상가였다. 임시정부 역시 그의 사상에서 나왔다. '대한인국민회가'가 결국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탄생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독립운동사에 있어 박용만의 가장 큰 업적은 최초로 해외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한인군사학교 설립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일제에 맞서는 항일운동이 장기화 될 거란 판단으로 우수한 장교를 양성하는 것, 그리고 선진교육을 통해 신지식을 배운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 그러나 미국에 대한 일본의 항의로 학교는 폐교된다. 이후 박용만은 하와이로 건너가 다시 '대조선 국민군단'과 '대조선 국민군단 사관학교'를 창설한다. 그러나 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 의해 압박을 받는다. 그러나 박용만의 행보는 멈추지 않는다. 하와이 한인들의 복리 증진과 독립운동 원조의 기치를 걸고 '대조선 독립단'를 창성하고 이어 국내외 각지에 산재한 무장단체들을 결집한 '군사통일회의'를 조직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정치적 야망보다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즈음에서 그는 의형제였던 이승만의 탐욕과 배신에 맞닥치고 만다. 이승만에게 고소를 당하고 증거불충분으로 기각되자 박용만은 시국소감을 발표하고 이승만과 완전히 갈라선다. 박용만은 이승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일 조국이 광복된 후에 이와 같은 인도자가 있으면 국가와 민족에 비운을 초래할 것이다.”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일생에서 가장 큰 정적은 우성이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간 박용만은 '대본공사'를 설립해 미개간지 구입, 개간사업으로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다가 결국 암살을 당한다. 이 암살의 배후가 누구냐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데 한 역사학자는 격동하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비극적인 사건으로 보는 게 옳다는 견해를 밝혔다. 판단은 그대들의 밝은 눈에 맡기겠다.

작은 동산에서 밭으로 변한 생가와 사라진 철원 시가지를 내려다보던 우리는 엉덩이를 털고 밭둑길을 내려왔다. 한 재야 사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박용만에 대한 연구가 미약한 것은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이승만의 치부를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금기시된 거라고…. 춘천으로 돌아가려는데 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권 기자에게 가까운 노동당사를 한 번 둘러보고 가자고 청했다.

노동당사 앞에는 전에는 못 본 총탄에 곳곳이 훼손된 도로원표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그곳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희미하게 이런 글씨들이 새겨져 있었다. 평강 16.8km, 김화 28.5km, 원산 181.6km, 평양 215.1km…, 우리가 잃어버린 무엇이었다.

⑴ 우성(又醒) 박용만 선생의 생가인 철원군 철원읍 중리 224번지에는 현재 농막이 들어서 있다.

⑵ 우성 박용만 선생의 생가인 철원군 철원읍 중리 224번지에서 김영규 (사)철원공감 대표(오른쪽)가 김도연 소설가에게 일제강점기 사진을 펼쳐보이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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