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박근혜 정부 들어 이따금 정책관련 회의에서 만나는 공무원이나 국책기관 연구원들은 '시민'이나 '평등' 같은 단어 사용을 한결같이 피했다. 이 정부가 싫어한다는 것이다. 왜 이 좋은 말들이 정부 정책에서 금기어가 되었을까?
'시민'이란 중세 봉건왕권사회를 무너뜨리고 근대 민주주의사회를 세운 사람들에서 유래한, 민주주의사회의 구성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평등'이란 왕이나 귀족 등 정치적 특권계급이나 자본가 같은 경제적 지배계급의 권력을 제한하고 국민의 동등한 권리를 강조하는 단어다. 결국 '시민'이나 '평등' 모두 민주주의사회를 설명하는 데 핵심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1996년 영국의 사회학자 니콜라스 로즈(N. Rose)는 '사회의 죽음(The Death of the Social)'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국가의 관료제적 통치기술이 극단적으로 발전해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축소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담긴 글이다. 이를테면, '마을 만들기'와 같은 국가 주도 프로젝트에서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여기에 각종 전문가들이 개입하면서 일반 시민들은 훈육의 대상이 되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돼 왔다는 반성이다. 국가의 관료제적 통치와 전문가의 기술적 지배의 대상이 된 시민들. 시민들의 자발성이 사라진 사회. 그것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2016년 11월 우리는 정반대의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국가 권력을 사유화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수많은 불법과 부정을 자행하고 국가의 통치체계를 무너뜨렸다. '공공성'이란 인식을 찾아보기 어려운 대통령의 행적과 최소한의 법적 울타리마저 아랑곳하지 않았던 측근들의 범법행위는 아직 검찰의 수사 중에 있지만, 그것을 의심하는 국민은 극소수다. '이게 나라냐'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공공성의 이념과 국가원수의 권위는 무너졌으며, 이를 바로잡을 책임이 있는 검찰도 되레 불신의 눈초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해외에서는 샤머니즘에 세뇌된 대통령의 풍자가 일간지에 실리고 측근의 돈세탁 범죄에 대한 수사가 국내보다 더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게 나라냐. 나라가 흔들려 온 것은 확실하다. 국가의 통치체계를 엄중히 관리하고 감독해야 할 수장이 공식 직함조차 갖지 못한 측근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자신 역시 권력을 이용해 거액을 끌어모으며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검찰의 조사를 회피하고 있다.
무너진 국가를 바로 세우는 책임은 결국 시민에게 있다.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범법행위를 두려움 없이 다룰 수 있는 관료나 공직자는 드물기 때문이다. 당장 '엘시티 수사'에서 나타나듯, 아직 공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대통령은 이를 무기로 공직자들에게 이런저런 위협을 가할 수 있다. '민주주의'보다 '공안통치'를 먼저 배운 박근혜 대통령은 공직자들의 약한 지점을 누구보다도 잘 활용할 것이다.
두려움 없는 시민들이 광장으로 모이고 있다. 무너진 공공성을 회복하고 나라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부패한 권력의 사슬을 끊고 민주주의를 확장하기 위해, 청년들에게 희망을 아이들에게 미래를 열어주기 위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고 있다. 이제 다시 시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