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을 핑계로 고려 친정하려 했던 거란 성종
강한찬의 ‘귀주회전' 대승 등 3차례 침공 격퇴
‘고려 현종' 조선 세종에 버금가는 명군 평가
목종 시기 1005년부터 동여진 공격 본격 대응
예종 1107년 윤관을 사령관 삼아 여진 정벌도
정강의 변 이후 북송과 단교 … 금과 사대관계
금나라 지도부 시종일관 고려 온건하게 대해
고려가 건국된 900년대 초 동아시아는 ①고려와 함께 ②한족(漢族)의 북송(北宋), ③우문선비(宇文鮮卑)의 후예 거란, ④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서하(西夏) 등이 병립한 헤게모니 실종의 시대였다. 고려는 G2 북송과 거란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했다. 주요 무역기지라는 실리가 고려 몫으로 떨어졌다. 거란이 중원으로 남진하기 위해서는 서하와 고려라는 배후가 안정돼야 하고, 북송이 거란을 견제하려면 서하와 고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는 잘 이해하고 활용했다. 고려는 ‘강동(압록강 동쪽을 의미) 6주' 확보 대가로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고 북송과 단교했다. 하지만 고려는 강동 6주 확보 후 10년 만에 다시 북송과 거란 간 등거리 외교를 시작하는 등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거란과 북송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다. 압록강변 의주 보주성(保州城)을 중심으로 한 강동 6주는 북송-거란-고려-일본-여진 간 교역 중심지였다. 고려 시대 무역이 성행했던 것은 고려가 개방적 무역국가였기 때문이다. 고려는 동남아와 중동의 페르시아(이란), 아라비아(오만, 예멘 등)와도 활발히 무역했다.
# 강동 6주 얻어낸 서희 외교담판
정안국과 올야국 등 후고려(발해) 부흥세력을 멸망시킨 거란 성종(聖宗) 야율문수노(耶律文殊奴)는 북송 공격을 위한 전초전의 일환으로 993년 동경(고구려 요동성 소재) 유수 소항덕(소손녕)에게 6만 대군을 주어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고려가 군사적으로 다소 불리한 상황에서 중군사 서희가 소항덕과 외교 교섭에 나섰다. 고려는 거란에게 여진족 거주지인 강동 6주를 점령하는 것을 허용해 주면, 북송과의 외교관계를 끊고 거란에 조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거란은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거란은 이후 탕구트족이 ‘북방의 강남(江南)'이라 불리는 인촨(銀川)을 중심으로 세운 서하도 굴복시켰다. 1000년경 북송은 외교적으로 고립됐다. 거란 성종은 1004년 북송 정벌을 위해 직접 20만 대군을 지휘, 지금의 베이징 일대인 연운(燕雲) 16주에서 발진, 북송 영토인 황허 유역으로 남진했다. 북송은 사노비 제도를 폐지하고, 일식(日蝕) 원리를 이해하며, 석탄을 대량 소비하고, 소비의 미덕을 강조할 정도로 앞서가던 나라였다. 북송 황제 진종은 재상 구준의 건의에 따라 30만 대군을 이끌고 황허를 건너 북상, 전주(푸양시)로 향했다. 몇몇 전투에서 거란군이 승리했으나, 거란군 원수(元帥) 소달름이 저격당해 죽은 이후 전쟁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거란, 북송 두 나라는 타협했다. 거란이 북송을 형으로 부르는 대신 북송은 매년 비단 20만 필, 은(銀) 10만 냥을 거란에 조공하기로 했다. ‘전연(?淵)의 맹(盟)'이라 불리는 이 조약을 체결한 후 거란-북송 관계는 안정됐다. 인종·언어적으로 몽골과 가까운 거란은 내·외몽골과 만주, 북중국 일부, 한반도 북부, 신장 등을 영토로 했다. 우리가 인종·언어적으로 친연(親緣)한 고구려(전고려)와 발해(후고려) 역사를 우리 민족사의 일부로 보듯이 거란사(遼史)도 중국사가 아닌 몽골사의 일부로 봐야 하지 않을까?
# 동아시아 패권국 거란 막아낸 고려
1009년 고려의 평안도 방면 군사령관 강조(康兆)가 정변을 일으켜 현종(왕건의 손자)을 옹립하고, 목종(왕건의 증손자)을 시해했다. 거란 성종은 강조의 쿠데타를 핑계로 고려를 친정(親征)했다. 강조가 지휘한 30만 고려군 본대는 (평북) 통주 전투에서 검차(劍車)를 앞세워 처음에는 승리했으나, 나중 소항덕의 형 소배압이 지휘한 거란군에게 대패했다. 강조 포함 고려군 수뇌부는 거란의 포로가 됐다. 거란군은 계속 남하, 개경을 점령하고 약탈했다. 현종은 개경을 탈출, 몽진하다가 (경기도) 양주에서 거란군 선봉대에 거의 따라 잡힐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현종은 한강, 금강을 건너 나주까지 몽진했다. 강동 6주 양규와 김숙흥 등의 별동대는 철군 중이던 거란군을 기습, 수만명을 죽였다. 거란군은 압록강 너머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찬(姜邯贊)은 1018년 거란의 3차 침공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소배압이 지휘한 10만 거란 정예군이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잘 조직된 고려군이 강력히 저항했다. 강한찬과 부장 강민첨이 지휘한 20만 고려군은 평북 귀주(구성)에서 철군하던 거란군과 회전(會戰)을 벌여 거란군을 대파하고, 거란 병사 수만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귀주 회전'에서 거란 성종의 친위대 등 고급 인재 6만여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만주족의 청(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조선과는 달리 상무정신이 살아 있던 고려는 동아시아의 패권국 거란의 3차례 침공(993~1019년)을 모두 격퇴했다. 거란은 다시 고려를 침공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전·후고려(고구려, 발해)와 함께 고려는 조선과는 차원이 다른 나라였다. 거란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 현종은 내치에도 성과를 거둬 조선 세종에 버금가는 명군(名君)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고려-거란 간 전쟁이 종료되고, 화평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던 1029년 랴오둥의 후고려(발해) 공동체 출신 대조영의 후손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켜(흥료국) 고려와의 연결을 시도했지만, 고려로부터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고, 곧 거란군에게 진압당했다. 거란 성종 말기~흥종 초기 정치 혼란으로 인해 많은 거란인이 고려로 망명했다. 고려는 이때 거란 정벌을 계획하기도 했다.
# 고려, 동여진 위협 대비 해군 증강 배치
함흥평야와 두만강 유역 일대를 장악한 동여진 포로모타부족이 11세기 초 동해에 접한 고려 영토와 일본 해안지역을 위협했다. 동여진이 동해 지역에서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후삼국 통일 이전은 물론 이후에도 고려가 북송, 거란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동해 지역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여진은 함선을 이용해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는 목종 시기인 1005년부터 본격적으로 동여진의 침공에 대응했다. 현종도 목종대의 정책을 계승해 1012년(현종 3년)까지 동해안 각지에 성을 쌓고 해군을 증강 배치했다. 해군을 관할하는 군사기구도 설치했다. 고려가 동여진에 대해 공격적으로 대처한 결과 동여진의 군사 활동을 둔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동여진은 100여척의 함선에 탑승한 4,000여 병력을 동원, 1011년 경주, 1012년 포항, 그리고 귀주대첩이 있었던 1018년 울진, 영덕까지 침공했다. 고려가 귀주대첩 주인공 중 하나인 강민첨을 파견하는 등 강력히 대응하자 동여진은 공격 목표를 일본으로 바꿨다. 1019년 3월 3,000여 병력이 탑승한 동여진 함대 50여척이 쓰시마를 침공했다. 일본은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도이(오랑캐) 도적'이라 했다. 동여진 함대는 쓰시마를 약탈한 뒤 퇴각했다. 쓰시마를 떠난 동여진 함대는 이어 이키에 상륙했다. 동여진 함대는 쓰시마와 이키 등에서 잡은 포로를 태운 채 4월 초 후쿠오카 인근을 약탈하는가 하면, 하카다만 노코섬도 공격해 주민을 포로로 잡았다. 고려 함대는 귀환하는 동여진 함대를 포착·격파하고, 일본인 포로 400여명을 구출했다. 동여진은 일본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1018년, 1019년, 1022년 3차례나 울릉도를 약탈했다. 동여진의 약탈로 울릉도는 황폐화 됐다가 고려의 지원으로 부흥했다. 1032년(덕종 1년) 울릉도주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고려 조정에 입조(入朝)시켜 토산물을 바쳤다.
# 여진군 격파하고 동북 9성 축조
한편 금(金)나라 발상지인 숭가리 울라(松花江) 하구 회령(야청·阿城)은 12세기에 이르러서도 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흑수말갈 계통 15만 완안부(完顔部) 주민이 사는 회령 일대 삼림·강·호수 지역은 여름철에는 몹시 덮고, 겨울철에는 몹시 추운 땅이었다. 완안부 포함 여진은 사냥과 어로를 생업으로 했으며, 뛰어난 전투기술을 갖고 있었다. ‘여진족 1만명이 차면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용맹했다. 여진족은 후고려(발해)가 멸망한 후 거란에 예속돼 공물(供物) 납부 등 각종 부담을 졌다. ‘금사(金史)'에 의하면, 금나라 시조 완안아쿠타의 조상 함보(函普)는 고려 출신이라 한다. 여진 완안부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한 것을 볼 때 여진은 고려를 거의 동족으로 대했던 듯하다. 12세기 들어 여진의 고려 국경 침입이 잦아졌다. 고려 예종(문제·文帝)은 1107년 윤관을 새로 편성한 부대인 별무반 사령관으로 삼아 여진 정벌을 시작했다. 출진한 고려 병사는 17만명에 달했다. 윤관은 무신(武神)으로 불린 척준경(拓俊京)을 앞세워 135개 여진 마을을 불태우는 등 여진군을 격파하고, 함흥평야부터 두만강 이북 280㎞(700리) ‘헤이룽장성 둥닝현 다오허진에 위치한 선춘령(이인철 교수 주장)'에 이르는 점령지역에 공험진성 등 아홉 개 성(동북 9성)을 축조했다(고려사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성호사설).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지리지는 서문(序文)에서 ‘고려의 경계가 서북쪽으로는 전고려(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쪽으로는 전고려의 경계를 넘어섰다'고 밝히고 있다. 고려는 7만5,000호가 넘는 남쪽 주민을 점령지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실시했다. 윤관의 여진 정벌은 조선이 두만강 하구까지 영토를 넓히는 배경이 됐다. 고려가 17만 대군을 동원, 마운령 이남 함흥평야 부근만을 탈환했다는 과거 주장(한백겸과 정약용 등이 마운령 소재 진흥왕 순수비를 윤관의 정계비로 오인해 주장했으며, 일본침략기 이케우치 등이 뒷받침)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고려는 ‘동북 9성'을 오래 지키지 못했다. ‘세종실록 지리지' 등 사서는 성(城) 간 거리가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웠다 한다. 고려군은 전쟁 초기 친고려적 여진 부족장 400여명을 불필요하게 살해했으며,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이는 여진인들로 하여금 회령(야청)의 완안부를 중심으로 뭉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됐다. 완안부에는 우야소, 아쿠타, 우키마이 등 영걸(英傑)이 잇달아 출현했다. 완안부는 고려의 공격과 거란의 압박을 뿌리치고, 1115년 헤이룽장과 지린, 갈라전(함경도와 연해주 등)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의 여진 부족들을 결집, 금나라를 세웠다. 그해 북송이 금과 함께 거란을 정벌하려 하자 고려는 급히 북송에 사신을 파견, 위험성을 경고했다. 금나라는 거란군을 연파하고, 1120년 거란 수도 상경 임황부(바린좌치)를 점령했다. 금·북송 동맹군은 같은 해 거란 제2의 수도 옌징(베이징)마저 점령, 거란을 멸망시켰다. 이후 금과 북송 사이가 벌어져 금은 1127년 북송 수도 카이펑을 함락, 전(前) 황제 휘종과 현(現) 황제 흠종을 포로로 잡았다(靖康之變). 한족(漢族) 지상주의자인 홍콩계 중국작가 고(故) 진용은 무협소설 ‘사조영웅전'에서 ‘정강의 변'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한족 출신 주인공의 이름을 ‘곽정(郭靖)', 그의 친구 이름을 ‘양강(楊康)'이라고 짓는다. ‘정강의 변' 이후 고려는 북송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금과 사대관계를 맺었다. 고려군의 막강한 전투력을 경험했던 금나라 지도부는 고려를 시종일관 온건하게 대했다.
백범흠 강원도 국제관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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