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 결말부분에 등장하는 엄흥도의 단종(노산군) 시신 수습 장면은 ‘조선왕조실록’에 시대별로 꾸준히 기록돼 있다. 실록은 서슬퍼런 세조대를 지나 중종 대부터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을 점차 구체적이고 확고한 기록으로 남겼다.
실록에서 엄흥도의 시신 수습 행적이 가장 먼저 확인되는 것은 1457년 단종이 세상을 떠난 후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중종 11년(1516년) 때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노산군의 묘를 설명하면서 ‘사람들 말이(人云)’라는 전언의 형식을 빌려 “고을 아전 엄흥도가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중종실록27권, 중종 11년 12월 10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당대 지역 사회에 널리 유통되고 있던 기억을 실록이 공식적으로 수록한 첫 사례다.
시간이 흘러 현종 10년(1669년)에 이르면 실록의 문장은 한층 확고해진다. 이때의 기록은 “아무도 거두지 않았는데 엄흥도가 곧바로 가서 곡하고 스스로 관곽을 준비해 염하고 장사했다(현종실록16권, 현종 10년 1월 5일)”고 서술을 명확히 정리했다. 또 “지금의 노묘(魯墓)가 바로 그 묘”라며 유적에 대한 인증 기록까지 덧붙였다. 이는 엄흥도의 충절을 널리 장려하고 그의 후손을 찾고자 하는 정치적·윤리적 권면의 맥락에서 실록에 명시된 것이다.
이러한 실록의 기록은 1900년 고종실록으로 넘어가며 한층 극적이고 세밀하게 장면화된다. 고종실록에는 “깊은 밤에 강을 건너 위로”했다거나, “직접 염을 하고 업고 가서 손수 장사했다(고종실록40권, 고종 37년 5월 16일)”는 등 당시 상황에 대한 묘사가 길게 이어진다. 이는 엄흥도에 대한 포상 및 불천위 제사(큰 공훈이 있는 이를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나라에서 허락해 지내는 제사) 등 국가적인 기림을 논의하는 문맥에서 등장한 것으로, 충신의 영웅적 디테일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내용을 시대별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중종 대의 초기 전언 형태를 시작으로, 현종 대의 사실 관계 정리 및 충절의 조명, 그리고 고종 대의 세부 묘사 확장에 이르기까지 실록은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소환하며 국가의 정식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