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라 평창 대화면 금당계곡 깊숙이 들어가자 길은 급경사로 바뀌었다. 빙판길에서 차가 뒤로 미끄러지더니 결국 도랑에 빠졌다. 약속 장소에서 걸어 내려온 구건서(70) 박사는 빠진 차를 보더니 “여기선 겨울철 연례행사예요.”라며 허허 웃었다. 쉰을 넘겨 공부를 시작해 환갑에 법학박사가 된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왜 차가 다니기조차 쉽지 않은 이 깊은 산골에 터를 잡았을까. 보험사 견인 서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강원도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청정지역이잖아요. 금당계곡 풍경은 경치 좋은 평창에서도 최고입니다. 그 가치는 돈으로 못 삽니다.”
구 박사에게 강원도는 삶의 방향을 바꿔준 터전이었다. 중학교를 마치지 못한 채 생계를 위해 택시 운전대를 잡았고, 운전석 핸들 위에 법전을 붙여가며 공부를 이어갔다. 공인노무사로 이름을 떨칠 때도 그의 시선은 도시가 아닌 산을 향해 있었다.
“서울 쪽 사람들이 홍천, 횡성, 평창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평창은 워낙 좋은 산들이 많아요.”
구 박사가 강원도의 산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병원과 상업시설, 문화 인프라가 부족한 현실은 인정하지만, 공기와 물, 햇빛과 숲이라는 기본 조건이 그 불편을 압도한다고 봤다. 강원 정착은 2005년 홍천에서 시작됐다. 2009년 횡성을 거쳐 2019년 평창으로 들어왔다. 고향은 충청도지만 강원 산을 따라 옮겨 다니며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다듬었다. 그가 쓰는 표현은 ‘귀농’이 아닌 ‘귀산’이다. 농사 수입에 기대는 정착이 아니라, 산을 기반으로 생활 구조를 설계하는 방식이라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임업 관련 교육도 400시간가량 이수했다.
그가 제안하는 강원 정착 방식은 완전 이주만이 아니다. 일정 소득을 유지하며 오가는 방식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일주일을 나눠 ‘5도 2촌, 4도 3촌’ 같은 체류형 모델이 젊은 세대를 강원으로 끌어들이는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산 귀농은 어렵습니다. 준비 없이 농사로 바로 소득을 내겠다는 건 쉽지 않아요. 차라리 산에 집 하나 짓고, 건강하게 먹거리 키우고, 일주일에 이틀이든 사흘이든 오가며 사는 게 더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5도 2촌, 4도 3촌이 그런 방식이죠.”
견인차가 가까스로 차를 끌어냈다. 경사로를 다시 오를 엄두가 안나 차는 산 아래 세워두고 그의 안내를 받아 함께 능선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펼쳐진 평지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골짜기, 겨울 햇살을 받은 숲의 윤곽이 또렷했다. 그가 왜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는지 짐작이 가는 절경이었다. 이곳이 본래 약속장소이자 그가 가꾸는 3만여 평 숲, ‘심심림(心心林)’이다.
심심림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겼다. ‘심심할 때 가는 숲’, 그리고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숲’이다. 그는 이 공간을 단순한 산림 체험장이 아니라, 일정 기간 머물며 일하고 쉬는 공간으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청년층 유입을 염두에 두고 워케이션, 공유오피스, 공유연수원 등을 결합한 ‘HOPS(Home, Office, Playground, Study room)’ 공간으로 명명했다.
“강원도는 젊은 친구들이 좀 내려와야 됩니다. 직장 생활이 힘들 때 여기 와서 한동안 일하고 잠도 자고…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면서 인생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은데, 지금은 일단 하나씩 기초 작업부터 하고 있어요.”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단어는 ‘독학’이다. 중학교를 마치지 못한 채 생계를 위해 택시 운전을 전전했지만, 운전대 위에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신호 대기 시간 몇 초를 아껴 책을 펼쳤고, 방송대 강의를 반복해 들으며 기본을 다졌다. “독학은 독하게 공부하라는 뜻 아닌가요.(웃음)”
그러나 도시에서의 치열했던 공부 생활은 결국 몸에 부담으로 남았다. 고혈압과 신장 수치 악화로 위기를 겪었고, 그는 그 시기를 ‘임계점’이라고 표현했다. 산중 생활은 회복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시골이 그런 회복 탄력성이 있어요. 대부분 사람이 너무 늦게 와요. 이미 임계점이 지난 거죠. 딱 그 임계점 전에 시작을 하면 자연 치유력이 힘을 발휘하는데, 그걸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 박사가 펴낸 책은 30권에 육박한다. 노동법·노사관계 전문서를 비롯해 인생 설계 프로그램 ‘내비게이터십’, 자서전까지 분야가 넓다. 최근에는 강원 산골살이와 은퇴 준비 과정을 담은 두 권을 추가로 냈다. ‘산중필담: 구건서의 시골사용설명서’와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100세 시대, 구건서의 은퇴사용설명서’다. 각각 2년간 언론에 연재한 글을 묶은 책으로, 토지 구입과 집짓기, 의료 접근성, 수입 구조 등 현실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담았다. 책 곳곳에는 강원도와 평창에 대한 애정이 담겼다.
“은퇴 준비를 안 하면 닥치고 나서 급해집니다.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가 무너지고 연금 준비가 안 돼 생활이 흔들리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시골도 준비 없이 내려오면 적응 못 하고 다시 올라가는 분이 많습니다.”
그가 시골살이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관계의 예의’다. 귀촌 갈등의 원인을 원주민이 아닌 이주민의 태도에서 찾는다. 시골로의 이동을 ‘사회적 이민’에 비유하며, 동네 관행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잘난 척, 있는 척, 배운 척하면 안 됩니다. 제 책에서도 쓴 내용이지만 ‘동네법’도 하나의 법입니다. 그 문화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는 평창군을 향해 ‘산림 수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정책 전환을 주문했다. 외지인을 배타적으로 보지 말고 생활인구로 받아들이는 관점, 허가와 행정 절차를 돕는 방식으로 바꾸는 행정 문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지 말고 도와주려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외지인을 같이 살아갈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구건서 박사의 삶은 화려한 성공담보다는 철저한 준비와 실천의 기록이었다. 그는 오늘도 책을 읽고 산나물을 돌보며 청년 세대가 머물 수 있는 숲을 가꾸고 있다.
△구건서 박사는 공인노무사로 활동하며 시니어벤처협회 회장,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 중앙경제HR교육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KBS ‘강연100도’, ‘아침마당’, K-TV ‘살어리랏다’ 등에 출연해 삶의 경험을 전해왔다. 쉰을 넘긴 뒤 중·고·대학 과정을 검정고시와 학사고시로 마쳤고, 61세 환갑의 나이에 고려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기업 CEO 등을 대상으로 강연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