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한국전쟁 발발 76주년을 맞이하였으나 강원도는 지금도 전쟁의 후유증이 가장 큰 지역이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도(道)로 남아있고 언제라도 군사적 충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개전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3년 1개월의 전쟁 기간에 38선 위아래로 전선(戰線)의 오르내림이 극적으로 전개되면서 도내 곳곳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중공군 개입 이후 1951년 1·4 후퇴 시기부터 1월과 2월 원주 일원에서 벌어졌던 원주전투에 관하여 제대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원주전투의 역사적 가치와 평가가 국내 다른 전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졌기 때문이다.
원주는 사방으로 주요 길목이 통하는 지리적 요충지로서 한국전쟁 당시에도 원주의 전선이 뚫린다면 중부 전선 전체가 무너지고 남부지방까지 순식간에 점령당할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전황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매튜 리지웨이(Mattew B. Ridgway)는 원주는 서울 다음으로 중요한 곳으로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방어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인민군 지휘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도 1950년 12월 17일 열린 마지막 참모 회의에서 한반도 지도 앞에 서며 원주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이고 이곳에서 돌파구를 찾는다면 대구까지 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강한 투지를 드러냈다.
개전초 춘천전투와 홍천 말고래 전투로 북한군의 공격을 일주일이나 지연시키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해 여름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북한군에 밀려 원주에서는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고 9월 30일 북진할 때도 양측이 단기간의 교전을 치르며 북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 중공군 개입 이후 1월부터 2월 사이 원주에서 벌어진 한국군과 유엔군, 북한군과 중공군 사이의 격전은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꿀 정도로 영향력이 큰 전투였다.
제1차 원주전투는 1951년 1월 5일부터 12일까지 벌인 전투로서 미 제10군단 소속 프랑스대대·네덜란드대대 등이 북한군 제5군단·제2군단을 맞이하여 접전을 벌였다. 인근의 충북 제천까지 후퇴하기도 했으나 혹한의 추위 속에서 반격을 거듭한 끝에 원주를 다시 탈환하였다. 이어 제2차 원주전투는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치러졌다. 네덜란드와 프랑스대대가 예속된 미 2사단 제38연대와 미 제187공수연대, 한국군 제3사단 제18연대가 치른 전투로서 원주 서북쪽의 325고지(만종역 뒷산, 영산) 전투에서 1만여 명의 중공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참전했던 한 미군 용사는 본인 저술을 통해 원주전투로 승리로 부산으로 철수해 한국을 포기하자는 유엔의 주장이 사라지게 되었고 원주전투가 곧 미국 남북전쟁의 게티즈버그전투와 같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참전용사들의 증언과 군사 기록 등을 취재한 또 다른 언론인 겸 작가는 횡성전투 이후 1951년 2월 14일 원주 북서쪽 섬강 변에서 이동 중이던 중공군 2개 사단 병력에 대한 미군의 집중 포격으로 중공군 2만여 명이 사망하거나 부상하여 원주의 섬강이 핏물로 흥건하게 물들어 흐를 정도가 되었다고 서술하였다. 탁월한 장비와 군수물자에도 후퇴를 거듭하던 유엔군이 원주전투를 계기로 역전의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미군 참전용사의 증언과 해외 저술가의 고증을 통하여 원주전투가 지닌 가치와 중요성이 큼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국내 연구와 국방부 조사 발굴 과정에서 원주전투에는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다루어졌다. 당시 인근 횡성전투에서 막대한 손실과 지평리전투의 전술적 승리가 크게 부각되고 그 중간지점에 있었던 유엔군 주도의 전투로서 배속된 한국군 카투사가 일부에 불과했으므로 증언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컸을 수도 있다. 역사적 가치가 큰 원주전투를 잊혀진 전투가 되지 않고 새롭게 조명하기 위하여 고령의 참전용사 증언과 미 국방부사료 등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물론 현장 발굴, 채록 등의 작업이 신속히 이뤄져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