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음식 평론서 ‘도문대작(屠門大嚼)’은 광해군 때인 1611년, 귀양지였던 전라도 함열에서 쓰였습니다. “푸줏간 앞에서 크게 입맛을 다신다.”라는 제목의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귀양지에서의 허기를 상상으로 달래기 위해 쓴 것입니다. 허균의 다른 저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 책은, 우리 사회 전반에 음식문화가 부흥하면서 함께 조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서문에서 “맛난 고기든 아름다운 꽃부리든 씹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라고 밝혔던 허균이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소개한 음식은, 맛난 고기도 아름다운 꽃부리도 아닌 바로 강릉의 ‘방풍죽’이었습니다. 허균은 “나의 외가는 강릉인데 그곳에는 방풍이 많이 난다.”라며 “달콤한 향기가 입에 가득해 사흘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다. 세속에서는 참으로 상품의 진미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이어서 “나는 뒤에 요산에 있을 때 시험 삼아 한 번 끓여 먹어보았는데 강릉에서 먹던 맛과는 어림도 없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올해 초, 이 ‘도문대작’을 섬세하고도 맛깔나게 풀이한 책 ‘허균의 맛’을 펴낸 강원대 김풍기 교수는 허균이 방풍죽을 처음 맛보았을 때를 임진왜란 시기로 특정했습니다. 이때는 허균이 그야말로 ‘바닥’을 헤매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참혹했던 피란길에서 아내와 첫아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허균은 훗날 아내 김 씨의 행장을 쓰며 “소 팔아 관을 사고 옷을 찢어 염을 하였으나 오히려 체온이 따뜻하므로 차마 묻지를 못하였다.”라고 당시를 애통해했습니다. 허균이 이 애통함을 끌어안고 노모와 함께 도착한 종착지가 바로 외가가 있던 강릉 사천해변이었습니다. 김 교수는 허균이 이때 방풍죽으로 텅 빈 가슴을 치유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저도 몇 년 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바닥’을 헤맨 적이 있습니다. 여러 병원을 순례했지만 끝내 ‘원인 미상’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었습니다. 그때 하루의 절반을 소파에 누워지내며 머릿속에 ‘나의 도문대작’을 만들어 보곤 했습니다.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른 음식은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닭개장’이었습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가 부족했던 시절에 최고의 영양식재료는 토종닭이었습니다. 누런 기름이 둥둥 뜨던 토종닭 국물을 두 세끼 먹고 나면, 남겨둔 닭고기에다 대파와 고사리를 첨가해 맛을 낸 닭개장이 식탁에 올라왔습니다. 돌이켜보니, 닭개장은 가난했던 시절 많은 식구가 토종닭 한 마리로 오래오래 버티는, 지혜 듬뿍한 음식이었습니다. 누런 기름이 둥둥 뜨던 토종닭 국물과 얼큰한 닭개장 한 그릇을 들이키면 금방이라도 병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병마에 시달리던 소설가 김유정이 세상을 떠나기 열하루 전, 친구 안회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삼십 마리 고아 먹겠다.”라고 한 구절이 절절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도문대작’에 등재될 1호 음식은 ‘어머니의 닭개장’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떠오른 음식은 ‘부새우조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경포호수 인근의 작은할아버지 댁에 인사를 가면 식단의 메인 요리가 부새우조림이었습니다. 부새우는 경포호수를 비롯한 강릉, 양양, 속초 인근의 석호에서 나는 아주 작은 곤쟁이를 지칭합니다. 새우와 닮았고, 물 위로 잘 떠 올라 ‘뜰 부(浮)’자를 붙여 부새우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은 금지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경포호수에서 뜰채로 부새우를 뜰 수 있었습니다. 가난했던 작은할아버지 댁의 작은 소반 위에는 부새우조림과 열무김치가 전부였지만, 저는 늘 고봉밥 두 그릇을 비우곤 했습니다. 그런 저를 작은할아버지께서는 흐뭇하게 바라보시곤 했습니다. 운이 좋으면 단오제가 열리는 이맘때쯤 강릉 중앙시장에서 부새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허균이 말했던 것처럼, 여러 번 혼자서 닭개장과 부새우조림 요리에 도전해 보았지만 끝내 옛맛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손맛과 작은할아버지의 미소가 배어있지 못한 탓이라 생각합니다. 허균의 방풍죽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