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석기시대에도 동굴은 주거 공간으로 이용됐다. 갈대로 덮은 움집보다 동굴이 훨씬 안전하고 안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연동굴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인공동굴을 만들기도 했다. 현재 춘천 한림대 내에 보존돼 있는 동굴유적이 그 사례다.
동굴은 1963년 10월 봉의산 중턱에서 성심여자대 신축 공사 중에 발견됐다. 풍화된 암벽을 파서 직경 약 4m의 둥근 방을 만들고, 한쪽으로는 낮고 깊숙하게 파고 들어가 저장 공간까지 마련한 완벽한 살림공간이었다. 동굴 천장에 시커멓게 그을음이 묻어 있어 동굴 안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사람이 살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사 결과 내부에서는 간석기류와 빗살무늬토기, 장신구 등이 3명의 인골과 함께 발견됐다.
간석기류는 대형도끼와 끌, 화살촉, 이음낚시, 길쭉한 봉모양 석기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길이 40㎝가 넘는 대형도끼 1점은 울진 후포리에서 다량 출토된 것들과 동일한 것으로 날부분이 많이 닳아 있다. 끌은 길이 10㎝ 내외로 나무 가공에 쓰였던 도구로 추정되며, 납작하고 길쭉한 형태의 화살촉은 신석기시대 동안 널리 사용됐던 사냥도구다. 이음낚시 허리는 1점뿐이지만 봉의산 동굴유적에 살았던 사람들이 소양강에서는 물고기잡이를, 봉의산 주변에서는 사냥을 하며 살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유백색의 원통형 옥 장신구 1점이 함께 발견됐다. 길이 11㎝로 신석기시대의 옥 유물로는 가장 크다. 양 끝에 0.5㎝ 깊이로 홈이 뚫어져 있어 어딘가에 고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빗살무늬토기는 모두 5점 발견됐는데 높이 10㎝ 내외의 항아리형 토기들이다. 굽은 편평하고 윗부분에만 누름문양이 베풀어져 있다. 동굴에서 출토된 사람뼈는 모두 3명으로 서로 발을 맞대고 벽 쪽으로 머리를 향한 채 방사형으로 누워 있었다고 전해진다. 출토된 유물과 동굴 천장의 그을음 등으로 보아 동굴은 처음에는 살림공간이었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나중에 무덤으로 사용됏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장을 조사하기 전에 공사로 인해 내부가 훼손됐고 사람뼈도 이미 제거돼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교동 동굴에서 출토된 토기의 형태와 문양 등은 동해안 신석기유적인 오산리유적과 관련성을 보여준다. 해안지역 유적과 내륙 깊숙이 위치하는 교동 동굴유적과의 유사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좀 더 많은 고고학적 자료가 조사돼야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김상태 국립춘천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