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타고 빠져나오는데 사이드미러로 물 쫓아와” 긴박한 순간
1996·1999년 수해 악몽 재현…대피 못 한 주민 30여명은 구조
1996년과 1999년 이후 최악의 수해가 다시 철원지역을 덮쳤다. 닷새간 지속된 집중호우로 5일 한탄강이 범람한 동송읍 이길리와 갈말읍 정연리는 물에 잠겼고 흡사 바다를 보는 듯했다.
이길리와 정연리는 1996년과 1999년에도 한탄강이 범람해 침수된 마을로 이날 오후 1시30분께 정연리를 흐르는 한탄천이 삼합교를 덮치면서 이길리 마을 옆을 흐르는 한탄강 본류의 범람이 예고됐다.
두 차례 수해를 모두 겪었다는 이길리 주민 최익환(60)씨는 “차를 타고 빠져나오는데 사이드미러로 보니 물이 쫓아옵디다.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라며 당시의 숨 가빴던 탈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최씨는 이날 오후 3시10분께 자신의 차량으로 이길리를 빠져나왔다. 지난 4일 저녁 네 자녀를 모두 신철원으로 대피시켰다는 그는 이날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 오전에 비가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자 이길리를 떠나 외출을 했다. 그러던 중 정연리 한탄천이 범람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이길리로 돌아왔고 아내를 데리고 긴급 대피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최씨는 “집 뒤쪽으로 물이 들어차는 게 보여 아내와 함께 옷 몇 벌만 급하게 챙겨 나왔다”며 “최근에 계속된 비로 마을길이 많이 파여 빨리 달릴 수도 없어 더 무서웠다”고 긴박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이곳에서 논농사를 짓는 이모(62)씨는 이날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농수로를 정비하다 마을에 물이 들어차는 것을 목격했다. 이씨는 “1996년과 1999년 수해를 당하고 이후 한탄강 제방을 더 높게 쌓아 그동안은 수해가 없었다”며 “집에 들어가 뭐라도 챙겨 나오려 했지만 빠른 속도로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한탄강이 제방을 넘고 결국 무너지면서 강물이 빠르게 마을로 밀려들어온 탓에 미처 대피하지 못한 경찰관 2명과 주민 30여명은 인근 산과 주택 옥상, 비닐하우스 위 등으로 대피했다가 119구조대에 의해 무사히 구조됐다.
이날 주민들과 함께 이길리를 빠져나온 동송지구대 소속의 박호석 팀장과 박기태 경장은 폐암으로 거동이 힘든 아버지와 함께 대피하려다 차량이 침수돼 오도가도 못한다는 아들의 신고를 접수, 오후 3시2분께 이길리로 진입했다. 그는 이들 부자를 태우고 마을길을 빠져나오려 했지만 10여분 사이에 급격히 불어난 물로 마을이 침수되는 것을 확인하고 이길리 초소 뒤편 야산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 과정에서 대피하지 못한 주민 3명을 구조해 안전한 곳에서 119구조대를 기다렸다 오후 5시께 무사히 빠져나왔다.
박 팀장은 “부자를 태우고 집을 빠져나오는데 차량 중간까지 강물이 들어차 급한 마음에 인근 야산으로 향했다”며 “마을을 덮치는 강물의 속도가 너무 빨리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철원=김대호기자 mantough@kwnews.co.kr